개요

게리 프란시온Gary Francione(1954)은 미국의 법학자이자 동물권 활동가입니다. 축산업을 비롯하여 모든 형태의 제도화된 동물 착취를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각 개인의 실천에 있어서는 비거니즘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선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가 기존 이론가, 활동가, 단체들의 입장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소개한다는 점입니다.

  • DxE는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며 동물 복지 운동의 효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하지만 프란시온은 DxE가 사실 안티-비건이며 오로지 동물 복지에만 관심이 있다며 비판합니다.
  •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의 저자이자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하며 인간의 사소한 이익을 이유로 동물을 학대하거나 도살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프란시온은 싱어가 동물을 얼마든지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했으며 동물의 복지만 개선된다면 어떤 식으로 이용해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며 왜곡하여 주장합니다.
  • 톰 리건은 동물권을 옹호하고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폐지를 주장했으며 권리론에 입각하여 종차별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프란시온은 리건이 사실 종차별주의자라고 주장합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면서 제시한 근거들은 하나같이 악의적인 왜곡 인용이며, 자신의 책과 웹사이트와 SNS를 통해 이 왜곡을 반복하여 전파하고 있습니다.

프란시온의 폐지론

프란시온의 입장은 2015년에 나온 <동물권: 폐지론적 접근>에 잘 정리되어 있어요. 동물 착취를 그저 규제만 해서는 안되고 완전히 폐지해야 하며 규제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부도덕하다고 말합니다. 비거니즘의 실천이 도덕적 기준선이며, 엄격한 비건이 아닌 모든 다른 선택지는 다 부도덕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입장은 피터 싱어와 톰 리건의 입장에서 더 선명한 지점들만 취해서 합친 후 이를 더 선명하게 만들어 놓은 형태입니다. 우선 싱어와 리건의 입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래요.

  • 피터 싱어는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 즉 모든 지각있는 존재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니, 이 관심사를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그는 결과론자이기 때문에 결과와 상관없이 원칙적으로 부당한 행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 이 경우에도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해서는 안됩니다.
  • 톰 리건은 모든 삶의 주체는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고 말해요. 도덕적 권리가 있다는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에요. 다만 ‘삶의 주체’이기 위해서는 믿음, 욕구, 인식, 기억, 미래에 대한 감각, 정서적 삶, 선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을 할 능력, 연속적인 정체성 등을 지녀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삶의 주체’이기 위한 리건의 기준은 ‘지각있는 존재’이기 위한 싱어의 기준에 비해 제약이 많기 때문에, 상당수의 동물에겐 도덕적 권리가 없어요.

싱어는 리건에 비해 더 넓은 범위의 생명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여겨요. 리건의 권리론은 싱어의 공리주의에 비해 예외적인 상황을 덜 허용해요. 이 둘을 섞으면 더 넓은 범위의 생명에 대하여 권리론에 입각한 더 엄격한 주장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프란시온은 모든 지각있는 존재는 도덕적 권리를 가진다고 말해요. (원칙 1)

그는 오로지 폐지만을 주장하며 모든 형태의 동물 복지 논의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동물 복지를 주장하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당장의 동물 착취를 용인하는 입장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특정 형태의 착취에만 집중하는 운동도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특정 착취에만 반대를 하면 다른 착취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프란시온의 입장에 따르면, 어떤 단체가 공장식 축산의 철폐에만 집중을 하면 이는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공장식 축산 이외의 다른 문제들(서커스, 동물원 등)은 암묵적으로 ‘덜 나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칙 2)

비거니즘 실천은 이 입장에 동의하는 개인이 따라야만 하는 최소한의 기준선이며, 단계적으로 육식을 줄이기(감소주의) 등 다른 모든 선택지는 부도덕하다고 말합니다. (원칙 3)

DxE에 대한 왜곡

웨인 셩Wayne Hsiung은 DxE의 활동가이자 공동설립자입니다. DxE는 인도적인 도축이란 기만이라고 주장하며 40년 이내에 완전한 동물 해방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는 풀뿌리 조직이에요. 한국에서도 다양한 방해 시위 활동으로 언론에 여러번 소개되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프란시온과 DxE가 지향하는 바는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프란시온은 DxE가 동물복지론을 지지하는 수많은 단체와 똑같으며, 안티-비건이라며 강하게 비판합니다.

프란시온의 DxE 비판글팟캐스트 토론 따르면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 웨인 셩이 2009년 쓴 “비거니즘 보이콧하기“라는 글에서 “비거니즘은 동물권 운동에 해롭다”고 썼는데, 그는 비거니즘을 오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안티-비건이다.
  • DxE는 오로지 동물 복지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이는 악의적인 왜곡이에요.

안티 비건이라는 주장

프란시온은 웨인 셩이 쓴 “비거니즘 보이콧하기”에서 다음 문장을 인용합니다.

비거니즘 개념은 동물권 운동에 해롭다. 동물 해방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첫번째로 보이콧 해야할 대상은 육식이나 유제품이나 달걀이 아니라… 비거니즘이다.

위 문장을 인용한 뒤 프란시온은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DxE는 “비건”이 더럽혀진 단어이며 동물권에 “해롭다”로 생각한다. DxE 리더인 웨인 셩은 비거니즘이 도덕적 기준선이라는 생각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이렇게만 보면, DxE가 비거니즘을 거부하고 육식을 비롯한 동물착취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이어지는 주장인 ‘피터 싱어는 동물을 이용하고 죽이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데 DxE는 피터 싱어를 따른다’는 왜곡과 연결해서 읽으면 더욱 그렇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애초에 프란시온이 셩의 글에서 인용한 그 문장 바로 뒤에는 ‘이는 도발적인 선언이니 설명이 필요하다’며 길게 의미를 부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셩의 부연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개개인의 비거니즘 실천만으로는 생각보다 효과가 적고, 여러 근거에 의하면 축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
  • 비거니즘은 (원래의 뜻과 달리) 대중들로 하여금 동물권 운동을 음식 취향에 대한 문제로 오해하도록 만드는 부작용이 있기도 하다.
  • 현재의 비거니즘 행태는 사회 운동이라는 큰 틀에서의 전략적 고려가 부족해 보인다.

프란시온은 팟캐스트에서 셩과 전화 토론을 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셩에게 ‘당신은 안티-비건’라며 수차례 윽박지르는가 하면, DxE의 모든 활동가가 비건인지 아닌지 묻는 등 무례하고 의미도 없는 ‘검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팟캐스트에서 전화 인터뷰를 진행한 진행자는 프란시온에게만 마무리 발언을 할 기회를 뒤 일방적으로 인터뷰를 끝내버립니다.

인터뷰 다음날 셩은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글을 올립니다.

어제의 토론에서 게리 프란시온은 반복적으로 DxE가 “안티-비건”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동물 이용을 용인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거짓입니다. 우리는 개개인이 동물 학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우리 커뮤니티 내에서 동물 생산품을 사용하지 않으려는 강력한 도덕적 규범을 공유합니다. (사실, 저를 비롯하여 많은 DxE 오거나이저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물을 먹는 이들과 함께 식사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비거니즘은 해롭다’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선택한 논쟁적 표현이고 글 전체에서 의미를 부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구절만 따와서 과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프란시온은 비거니즘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선이라고 주장했지, 비거니즘만 하면 충분하다고 주장하는게 아녜요. 셩의 주장도 맥락과 함께 읽어보면 비거니즘은 개인적으로 당연히 실천하면 좋겠으나 거기에서 멈춰선 안된다는 의미에 가까워 보여요. 어떻게 보면 비거니즘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에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프란시온의 어떤 주장들은 충분히 합리적이기도 해요. 특히 ‘비거니즘’에 대한 셩의 평가가 지나치게 인색하다는 점에 대한 비판 중에는 타당한 점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시온이 자신의 입장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상대의 글을 왜곡되게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동물 복지에만 관심이 있다는 주장

이어서 프란시온은 DxE가 전형적인 동물복지 옹호 단체라고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피터 싱어가 동물 복지만 중요하게 여기고 동물을 이용하고 죽이는 것은 얼마든지 용인하는데, 웨인 셩이 피터 싱어를 종종 인용하고, “동물 해방”처럼 싱어의 용어를 쓰고, 싱어가 제시한 철학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싱어가 복지만 중요하게 여기고 폐지론자가 아니며 동물을 이용하고 죽이는 것을 얼마든지 용인한다는 주장은 왜곡입니다. (잠시 뒤에 적을게요)

두번째 이유는 웨인 셩이 오로지 동물의 복지에만 관심을 둔다는걸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그 근거는 셩이 한 인터뷰 한 말입니다. 프란시온은 이렇게 말해요.

셩은 스스로 그 캠페인이 오로지 동물의 처우에 대한 것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음은 셩의 말) “우리가 Whole Foods에 요구하는 것은 기만을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이들은 자신들이 동물에게 동정어리고 친근한 처우를 했다고 홍보했습니다.”

이게 ‘오로지 복지에만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다릅니다. 이 인터뷰는 그동안 동물 복지를 홍보해온 한 기업의 공장에 몰래 침투하여 그 기업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혀낸 후에 한 인터뷰입니다. DxE가 이런 활동을 하는 이유는 프란시온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기업들이 주장하는 동물 복지가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DxE 공식 홈페이지의 글 사회적 변화는 끈적거리는 계단이다를 읽어보면 DxE가 동물 복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동물 복지 운동은 효과가 적었고 부작용이 많았으니, 동물 복지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장기적 전략과 함께 고려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입니다.

저는 동물 복지 운동에 긍정적 효과도 있고 부정적 효과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 동물 복지 운동을 어떤 형태로 얼마나 하는 것이 가장 옳은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시온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지 않다는 입장이고, DxE는 대체로 옳지 않으나 전략적으로 잘 조율하면 긍정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반대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고, 피터 싱어는 부정적인 영향도 있으나 긍정적 영향이 월등하다고 생각해서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결국 동물 복지 운동의 효과가 어떠한지,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지 등의 논의는 실증적인 연구나 다양한 실천을 통해 장기적으로 답을 찾아가야 하는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시온이 자신의 선명한 입장만 옳다고 말하며 다른 이들의 입장을 반대하고 이를 위해 상대방의 글을 왜곡하는 점은 무척 아쉽습니다.

피터 싱어에 대한 왜곡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동물 해방>의 저자입니다.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해요. 다만 두 가지 이유에서 동물 복지 또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첫째, 비록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철폐가 목표이지만, 목표가 당장 달성될 수는 없기에 그 사이에 동물들이 받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동물 복지 논쟁을 통해 동물 복지 문제를 대중들에게 가시화시키고 대중의 인식이 개선하면, 이로 인해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철폐를 더 빨리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시온은 역시 피터 싱어도 비판해요. 비판이야 할 수도 있는데 악의적인 왜곡을 반복하는 점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물은 자기 인식을 못한다고 말했다는 주장

<동물권: 폐지론적 접근>에서 프란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싱어에 따르면, 비인간 동물(또는 거의 모든 비인간 동물)은 시간에 따른 인지적 연속성을 갖지 못하므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다. 동물들은 자기 인식도 못하고 미래를 계획하지도 않으니 우리가 그들을 죽여도 신경쓰지 않는다. … 그는 동물에게 심각한 고통을 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동물을 계속 이용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싱어는 (제가 지금까지 읽고 찾아본 바로는)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싱어는 동물의 인지 능력에 대해서는 <동물 해방> 1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 자란 침팬지, 개, 돼지, 기타 여러 종에 속한 동물들은 뇌 손상을 입은 인간 아이에 비해 훨씬 뛰어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자아 인식을 하며, …

싱어는 생명윤리학자이며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을 비판한 책 <확대되는 원The Expanding Circle>을 펴낼 정도로 당대의 생물학 논의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싱어가 대부분의 동물은 인지적 연속성이 없다고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동물을 얼마든지 죽여도 좋다고 말했다는 주장

프란시온은 싱어의 발언을 인용하며 싱어가 동물을 죽이는게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은 프란시온이 인용한 싱어의 발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결국 동물을 죽이는거라면, 그걸 연민이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정말로 연민 어린 동물복지 표준에 따른다면, 즉 동물이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했다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위 인용을 소개한 뒤 프란시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벤담이나 싱어 같은 공리주의자들은) 우리가 동물을 이용하고 죽여도 신경쓰지 않는다. 이들은 오로지 동물을 어떻게 처우하고 어떻게 죽이는지에만 관심을 둔다.

마치 싱어가 동물 복지만 잘 되어 있으면 도축을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싱어가 한 말을 맥락과 함께 읽어보면 상당히 다른 뜻입니다.

싱어의 인용은 향상된 동물복지 표준안에 ‘연민’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싱어가 대답하는 맥락이었으며, 싱어가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은 살해가 괜찮다는게 아니라 ‘연민’이라는 단어를 쓰는게 괜찮다는 뜻입니다.

싱어의 입장은 항상 공장식 축산이나 동물 실험 등 제도화된 동물 착취의 완전한 폐지입니다. 싱어는 <동물 해방> 1장과 6장에서 고통 없는 살해가 나쁜 이유에 대해 언급합니다.

살해가 그릇된 행위임인 이유를 설명하기는 더 복잡하다. 이 문제를 일부러 덮어두고 있었고 앞으로도 당분간 미뤄둘 것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 다른 종에 가하는 폭압의 현 상태를 고려했을 때, 단순히 고통 및 쾌감에 대한 동등 고려 원칙만 적용해도 인간이 다른 동물에게 행하는 모든 종류의 주요 학대를 고발할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위 지문에서 싱어는 일단, 살해는 거의 모든 경우에 부당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기가 복잡하며 굳이 살해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인간이 동물을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알릴 수 있으니 논의를 미룬다고 말하고 있을 뿐, 살해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지 않아요.

싱어는 몇몇 특수한 경우에 살해가 용인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항상 강조하는 바는 누군가를 살해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살해할 대상이 인간인지 동물인지를 기준으로 결정하는 것은 종차별이니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톰 리건에 대한 왜곡

톰 리건은 <동물 권리의 옹호>, <동물의 권리, 인간의 잘못>의 저자입니다. 인간에게 인권이 있듯 동물에게는 동물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역시 공장식 축산의 완전한 철폐를 지지합니다. 다만 모든 인간이나 동물에게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고, 삶의 주체(대다수의 인간과 포유류를 포함)에게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리건도 싱어를 비판했으나 프란시온처럼 대놓고 악의적인 왜곡을 반복하는 정도는 아니었어요. 리건과 싱어 사이의 논쟁에 대해서는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운동과 톰 리건의 동물권 운동“을 참고해주세요.

종차별주의자라는 주장

싱어를 비판한 리건도, 프란시온이 보기에는 그저 종차별주의자일 뿐입니다. 이번에도 리건의 저서 <동물 권리의 옹호>를 왜곡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리건에 따르면, “죽음으로 인한 위해harm는, 죽음으로 인해 잃게 될 만족의 기회에 대한 함수이며” 동물의 죽음은 “위해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죽음으로 인한 위해에 비할 바는 아니”라고 한다.

즉, 인간의 죽음이 동물의 죽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종차별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는 종차별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입니다. 게다가 프란시온이 인용한 문장의 바로 다음 문단들에서 리건은 이러한 결정이 왜 종차별적이지 않은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리건은 개와 인간이 지닌 내재적 가치의 평등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개가 겪을 위해와 인간이 겪을 위해의 크기를 비교할 뿐이며, 누가 어떤 종류의 위해를 얼마나 크게 입는지는 그 개체의 특성과 관련이 있으며, 개체의 특성은 종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날개가 없는 인간에게서 날아다닐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새에게서 박탈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소한 위해이거나 위해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위해로 인해 삶을 박탈당하는 경우에는 ‘정상’ 발달한 인간이 개에 비해 더 큰 박탈이라는 것이 리건의 설명입니다.

위 설명을 여러 이유로 반박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종차별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결론

게리 프란시온은 엄격하고 선명한 입장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조금이라 벗어나는 모든 개인이나 단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본인 입장의 선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유명인들이나 단체의 주장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소개한 세 가지 원칙 이외에 몇 가지 원칙을 더 제시하고 있는데, 마지막 원칙인 6번은 ‘비폭력 운동’입니다. 하지만 프란시온 자신은 폭력적인 왜곡으로 다른 이들의 주장을 무참히 훼손하고 있습니다.

캐롤 J. 애덤스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채식주의/비거니즘의 비판자들이 텍스트를 훼손하는 방식을 대상화-파편화-소비의 순환으로 설명합니다.

  • 대상화: 텍스트를 몇 개의 핵심 요소들로 환원하고 면밀한 검토와 비판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 파편화: 텍스트를 조각내고 맥락에서 분리하기
  • 소비: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고 기존 육식 문화를 손상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

이는 육식주의자들이 동물을 대상화(동물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간주하기)하고, 파편화(도축하여 조각내기)하고, 소비(먹기)하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게리 프란시온은 동물권을 옹호하고 비거니즘이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의 비평적 왜곡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채식주의/비거니즘의 메시지를 훼손해온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그의 원칙 중에 ‘거짓말 하지 않기’가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