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숙명여자대학교 FEMI-POWER PROJECT 소속 <교차성을 벗어난 비건>에서 쓴 비건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교차성’은 실재 하는가라는 글을 뒤늦게 읽었어요. 그 글에서는 비거니즘-페미니즘-교차성-젠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1. 동물 운동 관점에서 보았을 때 페미니즘은 종차별적인 운동이다.
  2.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의 방향은 일치하지 않는다.
  3. 동물 운동과 여성 운동의 교차성은 오로지 암컷 동물에 대한 운동이라는 뜻이다.
  4. 동물 억압은 젠더 문제와 무관하다.

저는 이런 주장들이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의 목적은 특정 페미니즘의 입장을 비판하는게 아니라 비건-페미니즘의 이해를 돕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한 후 대화하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물 운동 관점에서 보았을 때 페미니즘은 종차별적인 운동이라는 견해에 대해

<교차성을 벗어난 비건>에서 인용합니다.

종차별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페미니즘은 인간 종에 속하는 여성의 인간 권리 확대와 향상에 해당한다. 이는 인간 중심주의 자체의 타파를 요구하는 동물권 운동에 의해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인간 중심주의 또는 종차별주의를 비판하며 동물 운동에 대한 철학적/윤리학적 근거를 정립한 현대의 이론가로는 대표적으로 피터 싱어와 톰 리건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페미니즘을 비판하지 않고 비판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싱어는 동물해방운동이 정당한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건의 동물권 사상은 칸트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칸트를 통해 페미니즘의 ‘성적대상화’ 논의와 연결됩니다.

두 사람의 견해를 짧게 소개하고 페미니즘과의 관련성을 부연해볼게요.

피터 싱어와 공리주의

싱어는 <동물 해방>에서 모든 지각있는 존재sentient being는 이익 또는 관심사interests를 가지기 때문에 이 존재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각 존재가 가지는 이익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싱어의 관점에서 여성은 지각있는 존재이고 따라서 이익 또는 관심사를 가집니다. 여성의 이익이 합당한 이유 없이 동등하게 고려되지 않는다면 이는 부당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여권 신장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은 부도덕한 사람입니다.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 운동은 공리주의를 근거로 하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공리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여권 신장을 주장해 왔습니다.

  • 공리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러미 벤담은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했습니다.
  • 다음 세대인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은 저명한 초기 페미니즘 저작 중 하나이자, 동시에 밀의 공리주의 사상을 잘 담아낸 저작으로 평가됩니다.
  • 피터 싱어는 <동물 해방>에서는 여성 해방이 합당한 이유를 근거로 하여 동물 해방 역시 합당하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동물 해방 운동의 근거가 됩니다.

톰 리건과 권리론

리건은 <동물의 권리, 인간의 잘못>에서 모든 삶의 주체subjects-of-a-life에겐 내재적 가치inherent value가 있기에 도덕적 권리moral right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리건의 관점에서 여성은 삶의 주체이고 따라서 내재적 가치가 있으며 도덕적 권리 또한 지닙니다. 권리론에 따르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면 이는 권리의 침해가 일어난 것이므로 부도덕한 일입니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단일한 사상이 아니기에, 리건의 권리론에 입각한 동물 운동을 비판하는 페미니즘 조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캐럴 길리건Carol Gilligan은 남성은 이원론적이고 위계적인 사고를 하는데, 남성적 사고방식은 이성이 감정보다, 객관이 주관보다, 개인주의가 공동체주의보다, 정의가 보살핌보다, 공정이 편향보다, 문명이 자연보다 좋은 것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합니다. 길리건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되는 양도불가능한 권리’라는 개념은 개인주의적이며, 권리에 대한 동등한 존중은 공정을 지나치게 강조하기에 남성적입니다. 길리건은 공동체주의, 보살핌, 편향, 자연을 여성적인 특징이며 이러한 특징들이 좋은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성에게 어떠한 본질적인 ‘여성적’ 특성이 있다는 이같은 견해는 본질주의적essentialism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비판이 현대의 여러 페미니즘 관점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들

전통적으로 동물 운동, 여성 운동, 흑인 민권 운동의 리더들은 겹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각각의 사회 운동 사이에는 다양한 교류가 있었습니다.

캐럴 J. 애덤스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18세기 이후 베지테리어니즘/비거니즘과 페미니즘 사이의 수많은 교류를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피터 싱어도 <동물 해방> 6장에서 이러한 교류를 일부 소개하고 있습니다.

  • RSPCA의 창시자 W. Wilberforce와 F. Buxton은 영제국의 노예제 폐지를 위해 함께 싸웠습니다.
  • <여성의 권리 옹호>로 유명한 초기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레프트Mary Wollstonecraft는 동물권에 대한 글들도 써왔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그의 남편인 공리주의자 윌리엄 고드윈은 윤리적 채식주의자였으며, 그의 딸 메리 셸리는 채식주의와 페미니즘의 메시지를 담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썼습니다.
  • L. Stone, A. Bloomer, S. B. Anthony, E. C. Stanton 등 초기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은 베지테리안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노예제 폐지론자인 H. Greeley와 함께 “여성의 권리와 베지테리어니즘”을 외치기도 했습니다.

소결론

요약하자면 동물 운동 관점에서 페미니즘을 종차별이라고 비판할 이론적 근거도 없고, 실제로 그러한 비판이 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페미니즘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주장이 적어도 300년간 지속되어 왔습니다.

페미니즘이 ‘차별적’ 사상이라는 비판을 받으려면, 페미니즘에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우대 받아야 한다거나 다른 합당한 근거 없이 여성들의 이익이 반드시 다른 집단의 이익에 비해 더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담겨야 합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근거 없이 여성에 대한 우대를 주장하거나 근거 없이 여성의 이익을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근거 없이 여성을 차별적으로 우대하자는 주장이 아닙니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 권리에 대한 요구는, 실현되어 마땅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으니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요구이며, 이는 정당한 정의에 대한 요구입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페미니즘에는 부인할 수 없는 정당성이 부여되며, 그렇기에 선의나 혜택 따위에 기대지 않고도 페미니즘이 마땅히 옳은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동물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의 방향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견해에 대해

<교차성을 벗어난 비건>에서 인용합니다.

종차별주의에 기인하는 비거니즘이 정말로 페미니즘과 추구하는 방향이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사이의 방향성은 생각보다 여러 측면에서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과는 별개로, “운동의 방향이 일치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 더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방향’에 대한 일차원적 사고와 잘못된 이분법

두 운동의 방향이 완전히 일치하면 애초에 두 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운동일겁니다. “방향이 같은가”라는 의문은 방향은 같거나 같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는 잘못된 이분법에 기인합니다.

한 사람은 정확히 동쪽으로 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정확히 서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두 사람은 협력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북동쪽으로 가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북서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적어도 북쪽으로 가야하는 경우에는 두 사람이 협력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운동의 방향은 일차원적이기 보다는 다차원적입니다. 운동의 다차원성을 체험해보려면 화살표 퍼즐 게임을 해보세요.

제로섬 게임과 논-제로섬 게임

위 화살표 비유는 운동이 다차원적이라는 점, 어떤 차원에서는 충돌하고 어떤 차원에서는 부합할 수 있다는 점 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좋은 비유입니다. 다만 각 차원이 제로섬 관계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 비유에서는 적어도 동-서 축이나, 남-북 축에 있어서 한 사람의 이익이 달성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사람의 손해가 커지며, 양측의 이익과 손해를 합치면 0이 됩니다. 즉, 북동쪽으로 가려는 사람과 북서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협력하면 적어도 북쪽으로는 잘 가겠지만 동쪽으로 가려고 하거나 서쪽으로 가려고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이득을 보는 만큼 다른 누군가가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제로섬 상황(합쳐서 0이 되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 세상의 많은 상황은 논-제로섬에 가깝습니다. 수감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상황처럼 두 사람이 모두 이익을 보거나, 두 사람이 모두 손해를 보는 상황이 많습니다. 국가 간 관계, 기업, 사회 운동 등 다양한 상황에서 본인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핵심적인 전략 중 하나는 되도록 많은 논-제로섬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방향의 유사성

잠시 후에 언급할 캐롤 J. 애덤스의 연구에 따르면,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사이에는 수많은 관련성이 있으며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여성 억압과 동물 억압은 모두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남성 권력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두 운동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련성이 있습니다.

소결론

두 운동이 일치하지 않기에 함께 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1)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불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이분법, 2) 오직 제로섬 게임만 상정하고 논-제로섬 게임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사고 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3) 두 운동의 방향은 상당히 일치하는데, 그 이유는 여성 억압과 동물 억압이 모두 가부장제에서 인하기 때문입니다.

동물 운동과 여성 운동의 교차성이 오로지 ‘암컷 동물 운동’만을 뜻한다는 견해에 대해

<교차성을 벗어난 비건>에서 인용합니다.

과연 비건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교차성은 실재하는가. 비거니즘을 동물권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문제가 되는 부분은 동물에 대한 착취이다. 말 그대로 암컷동물에 한정된 착취가 아니라 모든 동물이라면 겪는 착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중략) 페미니즘과 비거니즘의 교차성을 주장하려면 오직 암컷 동물만이 착취되는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수학적 교집합intersection으로 여기는 오해에서 비롯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차성이라는 말을 고안한 법학자 K. W. 크렌쇼우에 따르면, 교차성이란 여러 억압받는 정체성을 섞어서 교집합을 만들어내는 또다른 종류의 정체성 정치가 아닙니다.

… 어떤 이들은 종종 교차성을 그저 다중의 정체성에 대한 것으로 여긴다. “내 정체성은 세 개”, “너는 여섯 개” 등. (중략) 적어도 나는 교차성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교차성은 일차적으로 정체성 자체가 아닌, 사회 구조가 특정 정체성들을 취약성에 이르는 수단으로 만드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교차성에 대하여On Intersectionality 중에서.

블랙 페미니즘이나 교차성 페미니즘에 대한 이같은 오해에 대해, 블랙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 중 한명인 바바라 스미스Barbara Smith와 크렌쇼우는 이런 대화를 나눈 바 있습니다.

바바라 스미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현실을 무시하자고 말한게 아닙니다. … 특정 정체성을 가졌는지 여부만 따지면 충분하다는 주장도 아닙니다. 블랙 페미니즘은 실천에 대한 것입니다. (후략)

킴벌리 크렌쇼우: 저는 종종 (콤바히) 선언문에 대한 의도적 오독이 일어난다고 생각해요. 블랙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교차성 등 블랙 페미니즘에서 파생된 모든 것에 대한 의도적 오독이 있어 왔다고 생각해요. “블랙 페미니즘에서 하는 얘기라면 이미 다 알고 있고, 블랙 페미니즘과 관련된 얘기라면 완전 무시해도 괜찮아”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후략)

비거니즘과 페미니즘의 교차성이 그저 동물이라는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교집합을 만들어서 암컷 동물에 대한 운동만 하자는 뜻이라는 주장은 교차성에 대한 왜곡입니다.

제가 이해한 비건 페미니즘의 교차성이란,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 기제와 인간에 의한 동물 억압 기제의 유사성에 주목하자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또한 교차성 페미니즘은 겹쳐지는 정체성들의 교집합을 만들며 대상을 점점 더 좁히는 배제적 이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려진 억압 기제들 사이의 연결점과 구조를 드러내어 상호 분절된 피억압 집단들의 경험을 이어내는 포용적인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물 억압은 젠더 문제와 무관하다는 견해에 대해

<교차성을 벗어난 비건>에서 인용합니다.

동물의 착취는 성별과 무관하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기에 겪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차성을 ‘정체성 교집합’으로 잘못 해석하여 비건 페미니즘을 ‘암컷 동물 운동’으로 오해하는 동시에, 페미니즘이 말하는 억압을 단순히 ‘많은 남성들이 많은 여성들을 억압하는 문제’라는 표면적 현상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동물의 착취는 성별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의 기저에 깔린 구조에 대한 문제를 함께 생각한다면 동물 억압과 여성 억압은 서로 밀접하게 엮여 있습니다.

육식의 성정치

캐럴 J. 애덤스Caral J. Adams가 “왜 비건 페미니즘인가?“라는 짧은 글에서 암컷 동물이 겪는 억압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육식주의 사회에서의 암컷 동물을 착취도 중요한 주제인 것은 분명하지만, <육식의 성정치>에 담긴 애덤스의 페미니즘-베지테리어니즘 연결성에 대한 분석은 표면적인 ‘정체성 교집합’에 그치지 않습니다.

애덤스는 1970년대부터 수십년 동안 페미니즘과 비거니즘/베지테리어니즘 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학자이자 활동가입니다. 애덤스에 따르면 육식의 성정치란 여성을 동물화하고 동물을 여성화하는 태도이자 실천을 말합니다. 육식의 성정치란 또한, 남자에겐 고기가 필요하고 육식을 할 권리가 있으며 육식은 남성의 정력virility과 관계된 남성적 활동이라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믿음 체계와 이 체계의 실천은 가부장적 사회와 이 사회에서 남성에게만 차별적으로 부여하는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동물의 살을 음식으로 보는 관념에는 가부장적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목적에 따른 수단의 정당화, 다른 존재에 대한 대상화가 삶의 필수 요소라는 믿음, 폭력은 감춰질 수 있고 마땅히 감춰져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습니다.

애덤스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동물에 대한 억압과 여성에 대한 억압이 상호교차하는 방식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부재 지시대상absent referent이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주체는 여러 장치를 통해 부재 지시대상이 되며, 일단 그렇게 되고 나면 해당 주체가 겪는 억압의 경험은 다른 주체의 경험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젠더폭력 문제에 있어서 여성은 부재 지시대상이 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은 다른 주체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자연에 대한 유린”이나 “한미 관계에 있어서 한국이 미국에 돈도 대주고 몸도 대준다”같은 표현처럼요. 육식에 있어서는 동물이 부재 지시대상이 되며, 동물에 대한 억압이 여성 폭력에 대한 비유로 활용되곤 합니다. “마치 고깃덩이가 된 기분이다” 같은 표현처럼요.

성차별과 종차별 문제에 있어서 여성과 동물은 각자 부재 지시대상이 되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억압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이곤 합니다(여성 도축과 동물 강간). 하지만 부재 지시대상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교차적 관계를 인식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멜라니 조이의 “폭력적 이데올로기”

멜라니 조이는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에서 ‘육식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며 문제가 없다’는 신념 체계를 육식주의carnism으로 명명하고 이는 ‘폭력적 이데올로기’의 일종이라고 말해요. 그리고 모든 폭력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는 동일한 메커니즘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육식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를 이해하면 페미니즘 등 다른 폭력적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저항하는 경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멜라니 조이가 소개하는 폭력적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몇 가지 특징은 이렇습니다.

  • 체계 자체를 ‘보이지 않게’ 만들어서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기(비가시화)
  • 다른 존재를 물건으로 보기(대상화), 다른 존재를 개별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범주로 묶어서 취급하기(비개별화), 우리와 그들 사이를 구분하고 심리적 거리를 만들어서 쉽게 비난하고 착취할 수 있게 만들기(이분화)

육식-남근-로고스중심주의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역시 <육식의 성정치>와 유사한 글을 썼습니다. <육식의 성정치>의 초판본이 나올 무렵 데리다의 “잘 먹기Eating Well”가 영어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육식-남근-로고스중심주의carno-phal-logocentrism 개념을 소개하였습니다.

대륙 철학을 연구하는 Matthew Calarco에 따르면, 데리다는 이 글에서 주체subject가 된다는 것에 있어서 육식이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육식이 전통적 관점의 주체성, 특히 남성 주체성의 핵심에 놓여 있음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교차성 분석

교차성 분석intersectional analysis의 목적 또한 그동안 놓쳐왔던 교차적 억압의 존재를 드러내고, 기존의 정책이나 제도가 교차적 억압을 다루는 방식에서의 미흡한 점을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출처: A Primer on intersectionality)

요약 및 결론

각각에 대하여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동물 운동 관점에서 보았을 때 페미니즘은 종차별적인 운동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역사적 사실과도 다릅니다.
  2. 두 운동이 일치하지 않기에 함께 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1)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불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이분법, 2) 오직 제로섬 게임만 상정하고 논-제로섬 게임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사고 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3. 동물 운동과 여성 운동의 교차성이 오로지 암컷 동물 운동만을 뜻한다는 생각은 교차성을 교집합으로 생각하는 오해, 즉 ‘교차성이란 정체성 교집합을 만드는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이다’라는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4. 동물 억압은 젠더 문제와 무관하다는 인식은 억압이라는 현상 밑에 깔려 있는 구조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특정 페미니즘의 입장을 비판하는게 아니라 비건-페미니즘의 이해를 돕는 데 있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한 후 대화하는 게 서로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캐롤 J. 애덤스의 글을 인용하며 마치겠습니다.

지배는 단절되고 파편화된 문화에서 가장 잘 작동한다. 페미니즘은 연결성을 재인식한다. Dominance functions best in a culture of disconnections and fragmentation. Feminism recognizes connections. –<육식의 성정치> 20주년 기념판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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