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짧은 입문서' 요약
목차
개요
카타르지나 드 라자리-라덱Katarzyna de Lazari-Radek과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함께 쓴 <공리주의: 짧은 입문서Utilitarianism: A Very Short Introduction>를 읽었어요. 2017년에 나온 책입니다.
싱어는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과 <효율적 이타주의자> 등으로 유명한 도덕철학자입니다. 라자리-라덱은 폴란드 출생 철학자인데, 싱어가 선호공리주의에서 쾌락공리주의로 입장을 바꾸도록 설득한 인물이라고 해요. 이 둘은 <우주의 관점에서The Point of View of the Universe>라는 책도 함께 쓴 바 있습니다.
용어
우리말로 옮기면 비슷비슷하지만 본문에서는 구분해서 쓰고 있는 용어들이 있어요. 반대로 우리말로 옮기면 전혀 상관이 없게 보이지만 원문에서는 비슷한 표현들도 있고요. 되도록 일관성 있게 옮기려고 노력했습니다.
-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효용utility: 공리주의는 효용utility에 -ism을 덧붙인 말입니다. 효용주의로 번역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 공리功利는 “이로움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일 것 같아요. 여기에서의 이로움이란 이익/관심interest의 번역어라고 생각합니다.
- 웰빙well-being: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목표. 공리주의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의 일종인데, 추구하는 결과가 웰빙이면 공리주의로 분류합니다.
- 행복happiness과 쾌락pleausre, 괴로움suffering과 고통pain: 행복과 괴로움, 쾌락과 고통이 각각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쾌락은 행복에 기여하고, 고통은 괴로움에 기여해요.
서문Preface
공리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연구자들이 단지 이론적 기반을 다지는 일에만 머물지 않고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행복을 증진하고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위해 노력한다는 점입니다. 공리주의자들은 노예제도, 성차별, 종차별 등 대다수의 동시대인들이 수용하던 관습들을 비판하고 상당한 변화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항상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나 니체 등의 철학자, F. 도스토예프스키나 C. 디킨스, E. 개스켈, A. 헉슬리 등의 작가들이 공리주의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지금까지도 널리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해요.
(뀨: 도스토예프스키의 비판은 본문 중에 나와요. 마르크스가 공리주의를 어떻게 비판했는지는 따로 언급이 없어서 찾아봤어요. 제가 이해한 바를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라서, 관념에서 출발하여 물질적 현상을 설명하기보다는 물질에서 출발해서 관념적 현상을 설명해요. 이 관점에서 그는 인간의 생산력(노동력, 각종 도구 등)이 생산 관계(생산을 위해 인간이 인간과 맺는 관계, 인간이 도구와 맺는 관계 등 모든 관계)를 결정하고, 이 생산 관계로부터 경제 체제가 만들어지고, 이 토대를 기반으로 다양한 관념들(윤리, 법, 제도, 종교 등)이 만들어진다고 말해요. 이 관념들을 상부구조라고 불러요. 마르크스는 관념들의 토대인 경제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그 위에 어떤 관념을 올려놓아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봐요.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는 공리주의를 올려놓더라도 ‘행복의 총합 극대화’라는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때론 개인이 희생해야하는 상황이 발생하는걸 인간이 견딜 수 없으리라고 말해요. 결국 공산주의 체제를 토대로 하여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충하지 않도록 만들어야만, 공리주의이건 뭐건 그 위에서 돌아갈 여지가 있다는 말인 것 같아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르크스: 짧은 입문서’ 요약을 읽어주세요.)
윤리학의 핵심 질문은 “내가 마땅히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이고 정치철학의 핵심 질문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인데, 공리주의는 이 둘에 직관적인 답을 제공합니다. 공리주의자들은 마땅히 해야할 올바른 행동이란 최선의 결과best consequences를 가져오는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최선의 결과란 그 행동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존재들이 겪는 행복에서 괴로움을 뺀 차이의 합을 가장 크게 만드는 결과를 말해요. 단, 행복과 괴로움이 결과를 평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론을 크게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라고 불러요. 따라서 공리주의는 결과주의의 일종입니다.
(뀨: “그 사상이 아닌 것”이 무엇으로 불리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떤 사상에 붙은 이름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과주의가 아닌 사상은 무엇일까요? 대표적으로는 의무주의 또는 의무론deontology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옳은 행동이란 결과와 무관하게 주어진 의무를 따르는 행동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어 의무론자는 동물에게 권리가 있고 우리에겐 다른 존재의 권리를 존중해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종차별을 반대합니다. 결과주의자는 동물에게도 웰빙이 중요하고 종차별이 없어야 웰빙이 달성되는 “좋은 결과”에 가까워지므로 종차별을 반대합니다.)
제1장. 기원Origins
고대의 선각자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공리주의와 유사한 사상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중국 전국시대 묵자(490~403BC)라고 합니다. 당시 지배적 견해인 유교에서는 개인의 의무, 관계, 전통을 중히 여겼는데, 묵자는 전통이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전통을 따를 때 이득이 위해보다 큰지 따져야하며 주변 관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공리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규칙을 그대로 따를게 아니라 이득과 이해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을 고려한 불편부당성을 강조한 점입니다.
묵자는 인도의 고타마 붓다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붓다 또한 공리주의와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고 해요. 붓다는 모든 지각있는 존재sentient beings에 대한 연민을 통해 스스로와 타자의 고통을 줄일 것을 설파했습니다.
1세기 후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curus는 쾌락과 고통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제시했습니다.
초기의 공리주의자들
유럽에서는 이같은 사상이 18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차드 컴벌랜드Richard Cumberland(1631-1718)는 홉스Thomas Hobbes의 이고이즘egoism에 반대하며, “어떤 행동이 그 자체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선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Shaftesbury 경(1671-1713)은 최고의 선함이란 “보편적 선을 공부하고, 전체 세상의 이익interest을 증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주장했다고 해요.
흔히 벤담이 최초로 말했다고 잘못 알려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Francis Hutcheson의 “아름다움과 선 관념의 기원에 대한 연구(1726)”에서 처음 나온 표현이라고 합니다. 18C 중반 스위스-프랑스계 계몽주의 철학자 Claude Adrian Helvetius와 이탈리아 법학자 Cesare Beccaria도 유사 표현을 쓴 바 있습니다. 제레미 벤담은 C.B.의 글을 통해 해당 표현을 접했고 이후 이를 공리주의를 요약하는 표어로 차용합니다. 벤담은 또한 Joseph Priestley(1733-1804)와 흄David Hume(1711-76)의 영향도 받았다고 해요.
공리주의를 발전시킨 핵심 인물은 벤담이지만 이를 널리 알린 건 성직자 William Paley의 “도덕 및 정치 철학Moral and Political Philosophy(1785)”입니다. 그는 신이 모든 인간의 행복 증진을 원하니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W.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대한 고찰(1793)”도 공리주의적 사상을 담고 있는 초기 저작 중 하나입니다. (뀨: 고드윈은 페미니스트 철학자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남편이자, 페미니스트-베지테리언이자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인 메리 셸리의 아버지입니다.)
현대적 공리주의의 창시자: 벤담
제레미 벤담은 공리주의를 체계적 윤리 이론 및 사회 개혁의 기반으로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12세에 옥스퍼드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법 개혁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영재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다양한 인물과 교류했다고 해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1776년 무렵부터 그는 공리주의 실천에 집중했습니다. (다만 훗날 이 표현을 후회했는데, 51%가 약간 행복하면 49%가 끔찍한 불행을 겪어도 된다는 식의 오해를 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벤담은 1780년에 공리주의 이론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입문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세상에 알린건 약 9년 후입니다. 이는 벤담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해요. 그는 죽기 전까지 총 16권을 출간했으나, 사후에 3600만 단어 분량의 원고가 미출간 상태로 발견됩니다. 이는 약 80권 분량이며, 2016년 기준으로 이 중 33권이 출간되었습니다.
벤담의 사법체계 및 형무소 개혁 제안들도 유명합니다. 가장 유명한건 파놉티콘. 현대엔 체계적 사생활 침해라는 이유로 악명 높은 설계이지만, 벤담의 당시 의도 중 하나는 간수들이 죄수를 학대하지 못하도록 최고책임자가 감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 해요.
1770년대~1820년대 사이엔 성적 자유에 대한 글들을 썼습니다. 섹스는 빈부격차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주장했으며, 동성애에 대한 처벌을 반대했습니다. 다만 그는 이 글이 당시 대중에게 수용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글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상이 그로부터 150년이나 지난 후에 간신히 수용되기 시작했다는걸 알았을까요.
21세에는 본인의 신체를 해부 연구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깁니다. 당시엔 사형 당한 범죄자에 대한 해부를 제외하면 모든 인체 해부가 불법이었다고 해요. 이후엔 해부된 몸을 보존 처리하여 전시해줄 것을 유언에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유언에 따라 현재 런던 대학엔 벤담의 시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뀨: 단, 머리는 보존에 실패해서 밀랍으로 따로 만들었다고 해요)
유언에는 또한 공리주의를 지지하는 친구들이 방문할 경우 시체를 전시한 케이스를 꺼내 옮길 수 있다는 말도 담겨 있었는데, 이에 따라 이 책의 저자들(라자리-라덱과 싱어)은 존 스튜어트 밀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벤담의 시체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과 헤리엇의 딸 헬렌 테일러
밀의 아버지는 밀이 두 살일 때 벤담과 만나서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밀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르쳤는데, 3살에 그리스어를 익히고 8살에 라틴어를 익혔으며, 15살 무렵엔 대부분의 고전을 원어로 읽고 수학/논리학/과학/경제학을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벤담의 저서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밀은 벤담이 기존의 학자들과 “다른 존재”이며, 그로 인해 사상사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표현했습니다. 밀은 24세에 헤리엇 테일러를 만났고 그로부터 20년 후에 결혼합니다. 테일러는 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밀 스스로도 그동안 자신이 쓴 글은 그녀와 함께 쓴 것과 다름 없다고 밝힙니다.
밀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논리의 체계System of Logic”였으나, 공리주의적 사상을 담은 책은 “자유론On Liberty(1859)”과 “공리주의Utilitarianism(1861)”, 그리고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1869)” 입니다.
밀 자신은 “자유론”과 “공리주의”에서 고전적 쾌락공리주의classical hedonistic utilitarianism 원칙을 명시적으로 지지하였으나 일부 주장들은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밀의 입장을 두고 논쟁이 있어 왔다고 합니다. 이는 3장에서 자세히 다뤄요.
“여성의 종속”에서는 여성 차별을 비판하고 “완벽한 평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밀에 따르면, 테일러와 그의 딸이 이 책의 내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테일러는 “여성 참정권부여The Enfranchisement of Women”의 주 저자이기도 했는데 당시엔 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뀨: 밀의 <여성의 종속>은 가장 유명한 초기 페미니즘 저작 중 하나입니다. 밀은 이 책에서 한 성을 다른 성에 종속시키는 현재의 사회적 관계는 그 자체로 잘못되었으며 인간의 진보를 저해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기에, 완전한 평등의 원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밀은 1867년에 여성참정권을 보장하는 입법을 추진했으나 강한 반대로 인해 실패합니다.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은 그로부터 60년 지난 후에야 부여됩니다. 밀은 또한 결혼한 여성이 재산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고 해요. 단 재산권은 밀이 의석을 잃고 2년이 지난 후에 통과되었습니다.
‘윤리학 분야 최고의 책을 쓴’ 헨리 시즈윅
캠브릿지 트리니티 대학의 학생이자 교수였던 시즈윅Henry Sidgwick(1838-1900)의 가장 중요한 저작은 첫 저서인 “윤리학의 방법들The Methods of Ethics”입니다. 시즈윅은 이 책을 지속적으로 다듬었는데, 6판 개정 작업을 하다가 별세했습니다. 현대에는 이를 후대에 수정한 7판이 표준 판본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인간이 윤리적 결정을 내릴 때 쓰는 서로 다른 방법들(개인주의egoism, 직관주의intuitionism, 공리주의)을 비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시즈윅은 칸트의 의무론과 밀의 공리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책은 밀의 저서에 비해 더 치밀하고 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지나치게 두껍고 문장이 밀에 비해 깔끔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다고 해요. 존 롤스John Rawls는 이 책이 “여러 도덕 개념에 대한 체계적 비교 연구를 다루고 있는, 도덕 철학 분야 최초의 진정한 학술 저서”라고 극찬합니다. 시즈윅의 이러한 비교 방법은 현재 철학 분야 저술의 표준적 양식이 되었어요.
그는 “여성을 위한 강의”을 열고 수강한 여성들이 지낼 거처를 임대하여 추후 캠브릿지에 여성이 입학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시즈윅의 배우자 Eleanor Balfour는 수학에 능했으며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Rayleigh 경과 여러 논문을 공저한 인물입니다.
시즈윅의 제자 G. E. Moore(1873-1958)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는 점을 수용했으나, 오로지 쾌락이나 행복만이 본질적 선이라는 견해에는 반대하며, 우정 및 미에 대한 감상 등을 추가로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이상적ideal 공리주의 또는 다원공리주의로 불립니다.
무어의 가장 큰 기여는 “윤리학 원론Principia ethica”을 통해, 규범적 윤리 대신 “선” 등 윤리적 개념 자체를 탐구하는 메타-윤리학을 창시한 것입니다. 무어의 영향으로 한동안 메타-윤리학 연구가 활발했으나 1970년대 이후 다시 규범 윤리 연구도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제2장. 정당화Justification
벤담의 정당화
윤리적 질문에 답하고 상대를 설득하려면, 그저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되고 해당 견해에 대한 정당화도 제시해야 합니다. 어떠한 논증 형식이 올바른 정당화인지에 대한 견해는 윤리의 본질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자명한 제1원리에서 출발하는 시도를 근본주의라고 부릅니다. 롤스처럼 인간의 도덕 판단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따져보는 접근은 반성적 균형이라고 부릅니다.
벤담은 “도덕 및 입법 원리 개론”에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원리는 그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직접적인 방법 대신 간접적인 방법을 써서 제1원리를 증명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는 많은 이가 효용utility의 원리를 자연스럽게 수용한다고 전제합니다. 혹시 효용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모든 가능한 반론들을 숙고해보면 결국 효용의 원리를 수용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라자리-라덱과 싱어는 해당 내용에 대한 벤담의 설명이 지나치게 함축적이어서 문제라고 말합니다. 벤담의 증명에서 가장 큰 문제는, 벤담이 비-공리주의자를 설득하기 위해 사용한 비판이 사실은 공리주의 그 자체를 비판하는 논거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벤담은 만약 비-공리주의적 원칙이 있다면 그 원칙을 따를 동기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벤담 스스로도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벤담은 인간이 오로지 쾌락과 고통만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쾌락과 고통은 타인이 아닌 각 개인이 느끼는 쾌락과 고통을 뜻합니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만인의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쾌락과 고통만의 지배를 받는 개개인들이 모여서 만인의 쾌락과 고통을 생각하는 윤리 원칙을 따를 동기가 무엇일까요.
밀의 증명
밀의 저서 “공리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교재라고 합니다. 공리주의에 대한 수많은 정당화 중 밀의 논증이 가장 많이 논의된다고 해요. 하지만 그게 곧 그의 논증이 최고임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밀의 논증이 가장 많이 읽히는 까닭은 그의 논증이 모호하고 논란의 소지가 많아서 학생들이 토론하기에 알맞기 때문일 뿐, 밀의 논증 또한 벤담과 동일한 한계를 지닙니다.
밀은 직관 보다는 귀납에 의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했습니다. 밀은 모든 인간이 행복을 욕구desire하므로 이는 궁긍적 목적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 문제1: 마약 중독자는 마약을 욕구하는데 이게 정말 욕구할만한 것일까요? 즉, 인간의 모든 욕구가 마땅히 욕구할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 문제2: 헨리 시즈윅은 밀의 주장이 G.E.Moore가 말하는 자연주의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한다고 지적합니다. 오로지 ‘무엇이 자연스럽다(모든 인간은 자연스럽게 행복을 욕구한다)’는 주장만으로부터 ‘그것이 옳다(행복을 추구하는게 옳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오류입니다.
시즈윅의 증명
시즈윅은 밀과 달리 객관적 공리axiom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윤리학의 방법들”의 저술 목적은 객관적이고 자명한 도덕 공리를 찾는 것이었어요. 결론만 말하자면 시즈윅은 공리주의가 매우 그럴듯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만 개인주의egoism도 탄탄한 라이벌 이론이며, 개인주의는 틀리고 공리주의만 맞다고 볼 근거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공리axiom란 별도의 근거가 없어도 성립되는 기반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시즈윅은 철학적 직관주의자philosophical intuitionist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관주의자와 달리 그는 그러한 공리가 (다른 원리에 기대지 않기에) 자명self-evident하긴 하지만 면밀히 분석해보면 생각만큼 명백obvious하진 않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도덕 상식은 일견 자명하게 느껴지지만 따져보면 수많은 예외가 있음. 불치병 걸린 아이에게 불치병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나을 수 있다고 얘기하면 잘못일까요? 아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산타가 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까요? 명백해보이는 모든 도덕 상식은 사실 더 깊은 설명을 요하는데, 이러한 “깊은 설명”은 모두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라는 공리주의적 설명은 다른 도덕 이론에 비해 설명력이 더 나은 편이라고 말합니다.
도덕 이론이 우리의 도덕 직관을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믿음은 롤스의 “반성적 균형”과 유사해보이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반성적 균형은, 우리의 도덕직관에 따른 판단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 참된 이론이라는 관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시즈윅은 이러한 전제를 거부하고 이보다 좀 더 추상적인 차원의 원리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같은 자명한 추상적 원리가 다음 네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 명제의 용어들이 명백하고 정확할 것
- 신중한 숙고를 통해 명제의 자명성을 확신할 수 있을 것
- 명제들이 상호 일관성을 가질 것
- 동일한 판단력을 지닌 다른 이가 다른 판단을 내리면 명제에 대한 확신을 줄이고 내 착오일 가능성을 열어두며 적어도 일시적으로라도 중립 상태를 유지할 것
시즈윅은 위 제약을 만족하는 세 개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 정의Justice의 원리: 유사한 사례를 유사하게 취급할 것
- 신중prudence의 원리: 삶의 모든 순간(현재, 미래 등)을 불편부당하게 고려할 것
- 자비benevolence의 원리: 자기만의 선이 아닌 보편적 선을 고려할 것
시즈윅은 이 중 자비의 원리가 공리주의의 기반이라고 주장합니다. 단, 쾌락공리주의hedonistic utilitarianism를 주장하려면 오직 쾌락 또는 행복만이 내재적으로 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추가적 논증이 필요합니다. 시즈윅은 이 주제를 별도로 다루고 있습니다. (3장에서 소개할 예정)
다만 시즈윅은 앞서 제시한 네 가지 제약을 만족하면서도 자비의 원리와는 충돌하는 다른 원리로 개인주의egoism을 꼽았습니다. 이 둘이 충돌하며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그는 도덕의 합리적 기반을 제시하고자 했던 스스로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사니의 “무지한 상황conditions of ignorance에서의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에 기반한 논증
존 하사니John Harsanyi(1920-2000)는 게임 이론 연구로 존 내쉬John Nash와 노벨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 학자입니다. 하사니는 특정 선택이 본인의 이익에 미칠 영향을 모르는 경우, 합리적 개인주의자rational egoist는 전체의 평균 이익이 극대화되는 선택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야 본인의 기대이익expected utility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뀨: 저는 위 설명을 이렇게 이해했어요. 나에게 케익이 몇 조각이나 분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여러 크기의 케익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어떤 케익을 골라야 할까요? 내가 개인주의자라서 나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행위자라면 아마도 가장 큰 케익을 선택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받을 조각의 수가 몇 조각이건 간에 개별 조각의 크기가 커질테니까요. 즉 내 몫이 전체의 몇 퍼센트인지 모르는 상황이라도 기왕이면 큰 파이를 고르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당연한 이야기.)
역설적이게도 위 주장은 롤스가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을 논하며 공리주의를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하면서 유명해집니다. 롤스는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평균이익의 극대화 대신 가장 곤궁한 자의 이익을 높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이라고 주장했어요. 롤스의 주장에 대해선 4장에서 더 다룰 것텐데, 다만 지금은 이 주장이 롤스의 정의론에서 가장 약한 지점이라고만 언급하고 지나가겠다고 말합니다.
이후의 논문에서 하사니는 자신의 기존 논증을 더 형식화합니다. 이를 통해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상황에 대한 몇 가지 제한된 가정만을 기초로 공리주의 윤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 가정들 중 일부는 자명한 참이 아니며 반박 가능한 가정들이라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마트의 태도와 감정에 기반한 논증
J. J. C. 스마트Smart(1920-2012)는 “공리주의 윤리 체계 개요”를 펴냈습니다. 당시 철학자들은 도덕 판단이 태도나 감정의 표현일 뿐 참 또는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은 이성과 논증의 학문이므로 궁극적 윤리 원칙에 대한 논의는 철학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여겼어요.
스마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 원리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가능하다 주장합니다. 그는 공리주의가 참임을 “증명”하려는 시도를 하는 대신, 공리주의를 채택해야하는 이유를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설득은 이런 식입니다. 무자비한 결과를 야기하더라도 주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도덕 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도덕 원리는 참이나 거짓으로 증명할 수 없고 그저 태도나 감정의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 도덕 원리는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자비한 태도나 감정을 드러내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원리를 수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무론이 아니라 결과론(즉, 대체로 공리주의)을 수용해야 합니다.
다만 그는 이러한 설득이 통하려면 상대가 최소한 모든 인간 혹은 모든 지각있는 존재sentient beings를 위한 선한 결과를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어야 하며 이러한 태도가 없다면 위 설득 전략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규: 이미 결과론자여야 결과론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위 논증은, 공리주의자가 아닌 사람에게 공리주의를 설득하는 논증이 아니라 이미 공리주의자이지만 근본적 도덕 원칙은 철학적 탐구 대상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게 공리주의의 타당성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논증인걸까요?)
R. M. 헤어의 보편적 규정주의universal prescriptivism:
R. M. 헤어Hare(1919-2002)도 스마트 등과 마찬가지로 도덕 판단은 참-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단 스마트와 달리 감정이나 태도의 문제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도덕 판단을 규정prescription, 즉 명령문imperatives의 일종이라고 보았습니다.
규정은 비록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문장은 아니나, 여전히 논리 규칙을 적용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든 문을 닫아라”는 규정과 “뒷문은 열어라”는 규정은 서로 논리적 모순이기에 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규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철학적/논리적 사유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단, 무모순성을 따지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사유라면 공리주의를 지지할 논증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헤어는 시즈윅의 정의의 원리principle of justice(뀨: 유사한 사례는 유사하게 판단하기)를 차용하여, 도덕판단은 보편 속성에 기반해야 한다고 추가로 주장합니다. “너는 탈세하지 말라”는 규정은 “나도 탈세하지 않기”를 내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헤어에 따르면, 도덕 판단은 보편화가능성universalizability을 지녀야 합니다. 따라서, 규정으로써의 도덕 판단을 나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면 해당 판단에 의해 영향받는 모든 개인의 입장에서 그들의 선호와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판단이 맞는지 따져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곧 선호공리주의preference utilitarianism의 입장입니다.
스마트와 헤어는 모두 자명한 도덕적 진리에 의존하지 않고 공리주의를 옹호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는 설득은 청자가 특정한 주관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가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헤어의 논증은 모든 도덕적 언어는 보편화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곧 영향받는 모든 이의 선호를 동등하게 고려할 것을 강제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중간 요약
지금까지 살펴본 입장들:
- 벤담과 밀: 모두를 동일하게 고려하기
- 시즈윅: 한 개인에게 좋은 일은 다른 어떤 이에게도 동등하게 좋은 일로 간주하기
- 하사니: 무지한 상태에서의 선택 이론
- 스마트: 자애로움에의 요구
- 헤어: 행동에 의해 영향 받는 모두의 입장을 고려하라는 요구
이들의 공통점은, 공리주의를 황금률의 근저에 깔려 있는 통찰에 대한 최선의 이해이자 적용으로 간주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러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윤리의 핵심에 황금률과 유사한 원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며, 이러한 황금률과 공리주의 사이의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은 공리주의를 옹호하는 논거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원칙들을 공격함으로써 공리주의를 옹호한 그린
2000년대 이후, 도덕 판단에 대한 인지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공리주의를 옹호하는 논증이 탄생합니다. 단, 사실을 바탕으로 가치를 유도하는 잘못된 논증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뀨: 자연주의적 오류와 도덕주의적 오류를 말해요.)
실험심리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은 오로지 존재에 대한 명제만으로부터 당위에 대한 명제를 유도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공리주의를 옹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 두 가지 트롤리 상황이 있습니다.
- 스위치: Y자 철로. 그대로 두면 다섯 명이 죽고 스위치를 작동시켜서 철로를 바꾸면 1명만 죽는 상황
- 육교: 육교 위에 무거운 배낭을 멘 이방인이 난간에 기대고 있음. 나는 가벼워서 선로 위로 뛰어내려도 기차를 멈출 수 없고, 이 이방인을 밀면 기차를 멈춰 다섯 명을 구할 수 있음. 단 이방인은 죽을 것.
사람들은 스위치 상황에서는 개입을 하지만 육교 상황에서는 개입을 안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스위치 상황에서 죽는 1인은 5명을 살리는 과정에서의 부작용인 반면 육교 상황에서 죽는 1인은 수단으로 쓰인다는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상황은 어떨까요?
- 루프: 스위치와 동일하나 Y자로 분기된 철로가 이후에 다시 합쳐지며, 합쳐진 후에 다섯명이 있음. Y자 분기의 왼쪽 길엔 장애물이 없고 오른쪽 길엔 한 사람이 묶여 있음. 그냥 두면 기차가 왼쪽 길을 문제 없이 통과하여 다섯 명이 죽고 스위치를 작동시켜서 철로를 오른쪽으로 바꾸면 오른쪽에 묶인 한 사람만 죽고 기차가 멈춤.
루프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위치 상황과 마찬가지 선택을 합니다. 따라서 기존 설명은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린의 fMRI 연구에 따르면 스위치 상황에서는 인지cognition, 육교 상황에서는 정서emotion 관련 영역이 더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그린은 육교 상황이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했고, 지난 10년 사이에 이를 지지하는 여러 연구가 진행 됐습니다. 이를 이중처리이론dual-process theory이라 부릅니다.
그린은 이중처리이론에 따르면 도덕적 사고에는 1) 정서에 기반하여 빠르게 작동하는 자동 모드와, 2) 이성적으로 결과를 따져보며 작동하는 수동 모드가 있는데, 대부분의 일상에서는 자동 모드가 활성화되지만 (진화적으로) 생소한 상황에서는 수동 모드를 쓴다고 설명합니다. 이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원격 육교” 상황을 고안합니다.
- 원격 육교: 육교 상황과 동일하지만 나는 육교 위에 없음. 육교 바닥에 트랩이 있고, 내가 원격으로 트랩을 작동시켜서 육교 위 사람을 떨어뜨릴 수 있음.
실험 결과, 원격 육교 상황에서는 트랩을 작동시키겠다는 대답이 원래의 육교 상황(31%)에 비해 두 배 이상(63%) 증가했습니다. 사람을 직접 밀어서 죽이는지 아니면 원격에서 죽이는지 여부는 해당 행동이 도덕적으로 허용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 영향을 줘선 안될 것입니다. 독자들도 이 판단에 동의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트롤리 상황의 도덕 판단에 있어서 부적절한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고 점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단, 그린은 자동적 반응에 기반한 도덕 판단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는 결론은 성급하다고 말합니다. 몇몇 자동적 반응은 수백만년에 걸친 시행착오의 결과로 획득된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뀨: 게르트 기거렌쩌의 <적응적 사고Adaptive Thinking>랑 연결되는 이야기 같아요.) 하지만 진화적으로 새로운 상황인 경우 자동적 반응을 신뢰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의심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피임을 완벽하게 한 성인 남매가 삽입 성교를 하면 문제인가?”에 대해 대부분은 자동적으로 문제라고 판단하는데, 피임 도구의 존재는 진화적으로 새로운 상황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자동적 반응이 적절한지는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뀨: 제가 기억하는 원래 버전은… 1) 성인 남매이고, 2) 피임약을 복용하고 콘돔을 잘 사용하여 이중으로 피임했으며, 3)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4) 섹스 후 남매로써 더 친근하게 지내게 되었고, 5) 다시는 같은 시도를 하지 않았음. 이 때 이들의 섹스는 부도덕한가를 묻는 실험이었어요.) 한편, 잘 진화된 적응이 존재할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에서도 때론 자동적 반응을 따르는 것이 적절치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진화는 번식 적합도reproductive fitness를 최적화할 뿐이지, 개인의 행복이나 도덕적 지식 등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기존의 비-공리주의적 주장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칸트는 자위행위는 스스로를 수단으로 만들기에(뀨: 즉 스스로를 대상화하기에) 나쁜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겠지만 당대의 기독교 전통 사회에선 당연한 견해였습니다. 그린은 칸트의 의무론을 포함한 많은 종류의 비-공리주의 철학에 이같은 “본능쫒기intuition chasing” 경향이 있다고 비판합니다. 예를 들어 보복주의retributivism를 지지하며 더 잔혹한 형벌에 찬성하는 사람일수록 의식적 추론보단 자동적 반응을 더 따르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롤스는 반성적 균형을 설명하며 도덕 이론도 과학과 유사하게 근거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과학의 근거가 실험 데이터라면 도덕 이론의 근거는 인간들의 직관적 도덕 판단이고요. 이론적 설명과 직관적 도덕 판단을 비교하며 설명을 가다듬거나 일부 도덕 판단을 “관찰오류”와 유사하게 취급하여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반성적 균형이란 이를 반복하여 도달하게 되는 어떤 균형점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린이 옳다면, 이론이 도덕 직관에 영향을 받아선 안됩니다. 최소한, 각 도덕 직관이 어떻게 진화되었는지에 대한 근거에 기반하여 각 직관의 (도덕적 판단 근거로써의) 신뢰성을 보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뀨: 이 부분의 해석에 특히 주의가 필요하겠어요. 만약 진화적으로 충분히 잘 적응되었으며 현실에도 (번식 적합도 측면에서) 잘 부합하는지 따진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면 자연주의적 오류.)
그린의 연구는 정서에 기반한 자동 반응을 피하고 합리적 숙고를 해야할 필요성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그 “합리적 숙고”가 공리주의일 필요가 있을까요? 만약 시즈윅의 보편적 자비benevolence 원칙도 또한 진화적 자동 반응이라면? 저자들은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합니다. 보편적 자비는 진화에 의해 선택될 특성이 아니라 걸러질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진화 과정은 각 개체에게 이롭거나, 개체의 근친에게 이롭거나, 상호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소집단 내에서의 이타행위만 진화시키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요.
(뀨: 하지만 위 설명은 혈연적 이타주의kin-directed altruism와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만 다룬다는 점에서 미흡하다고 생각해요. 핸디캡 원리handicap principle 또는 값비싼 신호 이론costly signaling theory에 따르면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의 이타 행위가 진화할 수 있습니다. 싱어가 이런 부분을 다른 책/논문에서 언급한 바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쉽게도, 생물학적 이타주의에 대한 싱어의 이해는 1981년 저서 <확대되는 원The Expanding Circle>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이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여요.)
제3장. 무엇을 극대화할 것인가What Should We Maximize?
고전적 관점
벤담, 밀, 시즈윅은 쾌락hedonic 공리주의자입니다. 긍정적인 내적 가치는 오직 쾌락pleasure 또는 행복happiness 뿐이고, 부정적인 내적 가치는 오직 고통pain 또는 괴로움suffering 뿐이라고 말해요. 단 고통의 결과로 좋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진 않아요. 다른 말로 하면, 고통에는 긍정적인 도구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해요. 니체의 공리주의 비판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쾌락이 유일한 내적 가치라는 관점은 에피쿠로스 학파부터 로마 시대까지 통용되던 견해였습니다. 단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던 그 후 1500년 동안은 지지받지 못했다고 해요.
단 이 관점엔 항상 반론이 있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섹스를 하는 등 돼지도 즐길 수 있는 쾌락과, 오페라 감상 등 고상한 쾌락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에 대한 밀의 대답은 쾌락의 양 뿐 아니라 질도 중요하다는 것이었고, “차라리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이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밀의 대답에 대한 주요 반론은 쾌락에 고상함이나 지성적 등 질의 개념을 도입하는 순간, 쾌락 외의 내재적 가치를 제시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쾌락주의에서 벗어난다는 점입니다. 선택지는 두가지입니다. 쾌락의 질 개념을 버리고 쾌락주의를 고수하거나 다원공리주의 관점을 채택하거나.
경험기계The experience machine 사고실험
쾌락공리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은 1974년에 경험기계 사고실험을 제안합니다. 원하는 사람 누구라도 경험기계를 뇌에 연결하기만 하면 읽는 경험, 친구 사귀는 경험 등 원하는 모든 경험을 주입할 수 있습니다. 이 기계를 사용하고 싶은가요? 노직은 대부분 거절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내적 경험 외에도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사람들은 친구를 사귀는 느낌 말고 진짜 친구를 사귀길 원하기 때문이라고 해요. 많은 이들이 노직의 주장을 수용하여 경험기계 논증이 쾌락주의를 논파했다고 여깁니다.
(뀨: 위 논증에 대한 반박이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니 과연 있었어요. 다름 아니라 2장에 나왔던 조슈아 그린의 반론입니다. 영문위키백과의 경험 기계 항목 중 “반론Counterarguments” 부분을 참고하세요. 요약하자면, 경험기계에 대한 거부감은 자동적 반응이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사고실험을 살짝만 변형하면 결과가 달라질거라는 것이 그린의 주장이에요. 그린의 사고실험을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눈을 떠보니 당신은 병실에 누워 있습니다. 흰옷 입은 여성(왜 여성? 빻?)이 지금은 2659년이고 당신은 수십년간 경험기계를 이용 중이라고 설명해요. 10년마다 깨워서 경험기계 서비스를 중단할지 지속할지 여부를 묻고 있고, 마침 10년이 지나서 당신을 깨웠다고 해요. 서비스를 계속하길 선택하면 중간에 깬 기억은 사라지고 다시 경험기계 속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연인과 친구 등 소중한 경험이 모두 경험기계에 있는데 중단하시겠어요?
저라면 중단하지 않을 것 같아요)
선호공리주의preference utilitarianism
20세기 경제학은 효용utility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선호라는 개념을 발전시킵니다. 가격이 같을 때 사과 대신 귤을 고르면 그 사람은 그 순간에 귤을 더 선호한 것입니다. 단 먹어보니 후회할 수도 있어요. 선호에 따른 선택이 쾌락으로 이어지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습니다. 경제학의 효용utility과 선호공리주의의 효용utility는 유사하지만 완전 일치하진 않습니다. 공리주의는 경제학과 달리 ‘진정한 선호를 드러내는 관찰 가능한 선택’을 필수로 요하지 않습니다.
2장의 R. M. 헤어는 객관적 도덕적 진리란 없고 도덕 판단은 보편화가능한 규정이며 규정은 다시 개인의 선호와 욕구에 기반한다고 말하며 선호공리주의를 지지했습니다.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싱어도 오랜 시간 객관적 도덕적 진리 개념에 대한 회의로 인해 선호공리주의를 지지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선호공리주의는 쾌락주의와 달리 경험기계 반론에서 자유롭습니다. 경험기계는 쾌락을 줄 수는 있겠으나 그 쾌락이 진짜이길 원하는 나의 선호는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Derek Parfit이 두 가지 반론을 제시합니다.
- 이타적인 마약상: 쾌락도 없고 아무 부작용도 없이 중독성만 있는 마약을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하는 마약상이 있습니다. 중독자들은 마약을 하며 본인의 선호를 충족하므로 선호공리주의에 따르면 마약상의 행동은 선행입니다.
- 기차에서 만난 낯선이: 기차를 탔는데 옆자리에 앉은 낯선이가 본인의 장래 희망을 말해줬고 당신은 이를 진심으로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낯선이와 헤어진 후 다신 만나지 않있고, 이후에 서로 아무 영향도 주고 받지 않았더라도 낯선이의 꿈이 당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면 당신의 선호가 만족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당신의 삶이 더 나아졌을까요? (뀨: 두번째 반론은 경험기계 논증에 대한 선호공리주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에 가까운 것 같아요. 선호공리주의자는 욕구가 만족되었는지 여부를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도 욕구가 실제로 만족되었는지 여부를 중요히 여긴다는 점의 기이함을 드러내는 논증이라고 생각해요.)
그 밖에도 여러 의문점들이 있습니다. 선호공리주의는 현재와 미래의 욕구를 중시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욕구는 어떨까요? 평생 무신론자였던 지인이 죽기 직전 회개를 바라며 신부님을 찾는다면 이를 들어주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과거 정신이 맑을 때 밝혀온 욕구를 존중하여 거절하는게 좋을까요? 죽은 자의 욕구와 선호 문제를 생각해보면 더 복잡해집니다. 자기 묘비에 쓰고픈 문구가 있었습니다. 사후에 실제 그 문구가 쓰이면 당신의 행복이 증가할까요? 기차역에서 만난 낯선이의 경우와는 어떻게 다를까요? 즉, 죽은 뒤 실현되기에 알 수 없는 욕구와 살아있을때 실현되지만 내가 알 수 없는 욕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죽어가는 무신론자의 경우처럼 생각이 온전치 않거나 정보가 부족해서 잘못된 욕구를 가지게 된 경우에도 그 욕구가 실현되는게 좋은 것인지에도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오해로 인해 누군가에게 잘못된 복수를 감행했다면 이는 욕구 만족이므로 좋은 것일까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일부 선호공리주의자는 충분한 근거와 숙고에 기반한 선호만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입니다. 신을 믿는 이가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깨워달라고 부탁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당신은 신이 없다는걸 알고 있기에 그 사람을 깨우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근거와 숙고에 기반한 판단으로 상대의 선호를 무시해도 될까요?
선호공리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사악한 욕망도 존중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충분한 근거와 숙고를 통해 아주 사악한 선호를 “강하게” 갖게 된 경우 이 선호에도 다른 강한 선호와 동일한 가치를 부여해야 할까요? 일부 선호공리주의자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반면, 하사니 등 일부 공리주의자는 이를 거부하며 “합리적인reasonable” 선호인지가 중요하다고 답합니다. 그러나 선호의 합리성을 따지는 순간 욕구 기반 이론이 아닌 객관적 선objective good에 관련된 완전 다른 이론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다원결과주의pluralist consequentialism
쾌락공리주의는 경험기계 반론에 취약합니다. 선호공리주의는 이 문제가 없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많은 추가적 문제가 있습니다. 세번째 선택지는 ‘이상적ideal 공리주의’ 또는 ‘다원결과주의’라 불립니다.
이들은 쾌락공리주의자와 달리 쾌락 외에도 지식, 진리, 미, 정의, 평등, 자유 등 다른 내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선호공리주의자와 달리 이러한 내적 가치들이 개개인의 선호와는 무관하게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 중에서 일부는 다시 내적 가치가 웰빙을 구성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일부는 웰빙과 무관하다고 주장. 공리주의는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고 주장하고, 좋은 결과란 웰빙을 말하기 때문에, 내적 가치가 웰빙을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공리주의자이고, 웰빙과 무관한 다원적 내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리주의자가 아닌 그냥 결과주의자입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다시 둘로 나뉩니다. 가치들이 의식을 가진 생명체로부터 파생된다는 관점과 그러한 생명체의 존재와 무관하게 가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
도표로 그려보면 이런 모양인 것 같아요. 이 중 저자들이 지지하는 입장은 색칠을 했어요.
각 입장의 차이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런 식인 것 같아요.
- 의무론: 의무의 이행이 중요
- 결과주의: 결과가 중요
- 공리주의: 결과가 중요한데, 여기에서 결과란 웰빙을 의미
- 쾌락공리주의: 결과가 중요하고, 결과란 웰빙이며, 웰빙에 영향을 주는 내적 가치는 오로지 쾌락과 고통 뿐
- 선호공리주의: 결과가 중요하고, 결과란 웰빙이며, 웰빙에 영향을 주는 내적 가치는 욕구와 선호의 만족. 선호가 만족된다고 하여 반드시 쾌락이 보장되지는 않음.
- 다원공리주의: 결과가 중요하고, 결과란 웰빙이며, 웰빙에 영향을 주는 여러 내적 가치가 있음.
- 비공리주의적 결과주의: 결과가 중요하고, 웰빙과 무관한 여러 내적
가치가 있음.
- 다원결과론1: 결과가 중요하고, 웰빙과 무관한 여러 내적 가치가 있으며, 이 가치는 지각있는 생명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함.
- 다원결과론2: 결과가 중요하고, 웰빙과 무관한 여러 내적 가치가 있으며, 이 가치는 지각있는 생명체의 존재유무와 무관하게 가치가 있음.
- 공리주의: 결과가 중요한데, 여기에서 결과란 웰빙을 의미
다원공리주의는 개인이 특정 내적 가치를 신경쓰지 않아도 그 가치의 실현이 개인의 웰빙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을 평가하려면 무엇인가가 내적 가치를 지닌다는게 어떤 의미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밀은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며 자유가 웰빙에 있어서 중대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은 자유가 행복과 무관하게 웰빙에 영향을 주는 내적 가치라는 관점을 옹호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밀은 효용이 모든 윤리적 질문에 대한 궁극의 평가 기준이며, 효용이란 행복 또는 쾌락에 의해 설명된다고 주장한 것으로 미뤄보면 밀 또한 ‘자유’와 같은 다른 다원적 가치를 도구적 가치로 보았다고 해석하는 편이 합리적입니다.
다음은 웰빙과 무관한 다른 내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다원결과주의 관점인 다원결과론1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 관점의 첫번째 문제는 어떤 가치를 무슨 기준으로 목록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해 답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답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고전적 공리주의자(즉 쾌락공리주의자)는 다원론자가 착시의 피해자라 주장합니다. 다원론자들은 지식/정의/평등이 사회를 좋게 만들기에 가치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 가치들이 내재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가치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면 정부가 사소하고 단기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이러한 가치들을 쉽게 맞교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때문에, 이 가치들이 내재적 가치라고 주장하길 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고전적 공리주의자들은) 여깁니다.
지각있는 존재와 무관한 가치Value beyond sentient beings
다원결과주의의 세번째 종류는 지각 있는 존재가 없더라도 여전히 내적 가치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고 관점(다원결과론2)입니다. 예를 들어 G. E. 무어는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존재가 없더라도 아름다운 세상이 못생긴 세상에 비해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추후에 이 주장이 오류였으며 의식과 무관한 내재적 가치란 없다며 기존 입장을 수정합니다.
20세기 이후 일부 환경주의자들도 야생의 보존과 생물다양성 보존이 의식있는 존재의 유무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식물종의 멸종에도 관심을 보인다는 점, 동물의 경우에도 희귀종에 더 큰 관심을 보인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개별 개체가 겪는 고통보다는 (문화 유산의 보존처럼)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 인간 또는 의식있는 다른 존재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하는 가치는 내재적 가치가 아닌 도구적 가치입니다.
내재적 가치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야기
경험기계에 대한 거부감은 쾌락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 근거였습니다. 선호공리주의는 경험기계 논증을 버텨낼 수 있지만 악한 선호도 인정할지 아니면 선호를 검열할 것인지 등 어려운 선택을 해야하는 난점이 있습니다. 다원결과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가치는 따져보면 도구적 가치일 뿐입니다.
쾌락공리주의 관점에서 경험기계 논증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거부감이 들까요. 실제 삶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직관적 반응일까요, 아니면 영화에서 묘사된 기계의 섬뜩한 이미지 때문일까요. 또는 지금의 삶을 버려둘 수 없다는 걱정 때문일까요, 혹은 기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걸까요. 어쩌면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지기 싫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가짜보다 진짜를 더 선호하는 심리적 경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합리적으로 변호하기 어려운 진화의 산물입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이미 경험기계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해준다면 기계를 중단시킬까요? 여러 실험에 따르면 대부분은 현재의 삶이 가짜라는게 밝혀져도 중단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뀨: 앞서 찾아본 조슈아 그린의 변형된 사고 실험고 동일한 논증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가능성 중 하나라도 경험기계에 대한 거부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무엇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해 “쾌락”이라고 답하는 고전적 공리주의 관점은 여전히 방어 가능한 입장입니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쾌락공리주의의 입장처럼 쾌락이 유일한 내재적 가치이건 아니면 다원론자의 주장처럼 여러 가치 중 하나이건 간에, 쾌락이 무엇이며 이게 행복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독서, 영화감상, 섹스 등 온갖 행위가 쾌락을 야기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음. 하나는 쾌락을 일으키는 다양한 경험에는 ‘계속 지속되길 원한다’는 우리의 태도attitude 외엔 공통점이 없다는 입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들 사이엔 공통된 느낌의 톤feeling tone이 있다는 입장입니다. 두 입장 모두 장단점이 있습니다.
- 태도 입장은 여러 종류의 쾌락이 갖는 공통점을 설명할 필요 없이도 왜 쾌락이 우리의 웰빙을 증진시키는지 설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쾌락이란 우리가 계속 느끼고 싶어하는 무언가입니다. 따라서 쾌락은 웰빙을 증진시킵니다.
- 느낌의 톤 입장은 신경과학적 발견에 더 잘 부합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J. Olds and P. Milner 1954>에 의하면 무엇을 원하는 것wanting과 쾌감을 느끼는건 별개의 프로세스라고 합니다. 동기와 쾌감은 별개이며, 신경과학자들은 쾌감을 감각sensation 위에 덧칠한 광택제 같은 것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이는 “느낌의 톤”이라는 관점과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쾌락에 대한 입장과 별개로, 쾌락과 행복이 (고전적 공리주의자의 주장처럼) 같은 것인지도 생각해볼 주제입니다. 고전적 공리주의자는 연속된 크고 작은 쾌락이 모인게 행복인걸로 취급하곤 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심리적 조건condition, 지향orientation, 기질disposition에 가깝습니다. 기질은 기질이 어딘가를 향하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남을 돕고자 하는 기질은 남을 돕는 행위로 이어지기에 가치 있습니다. 행복이 기질이라면 행복 자체에 내적 가치가 있는게 아니라 행복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느낌positive feeling에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행복이나 쾌락에 대한 수많은 연구거리가 존재합니다. 공리주의자에게는 이 모두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뀨: 3장 뒷부분의 쾌락과 행복을 다루는 내용은 잘 정리되지 않은 사족 같은 느낌이 들어요.)
제4장. 반론들Objections
공리주의는 부도덕한 행동을 유도하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엔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유명한 논증이 나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 전제1: 공리주의가 사실이라면 공리주의는 무엇이 옳은 행동이고 그른 행동인지 알려줄 것
- 전제2: 공리주의는 죄없는 어린 아이를 고문 살해하면 다른 모두가 행복해지며 그 외 다른 방법은 없는 상황에서라면 아이를 고문 살해하는게 옳다고 주장
- 전제3: 죄없는 어린 아이를 고문 살해하는 행동은 언제나 부당함
- 결론: 공리주의는 옳지 않음
공리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이 위 논증과 거의 유사합니다. 이 논증을 반박하려면 전제2 또는 전제3을 반박해야 합니다. 전제2를 반박하는 전략 중 하나인 “규칙공리주의”는 5장에서 설명하며, 여기에서는 표준적인 공리주의(행위공리주의)에 기초한 반론을 다룹니다.
우선, 죄없는 아이를 고문 살해하는 행위가 어떻게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가설적으로 그렇다고 가정해보라”고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만약 그러한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고 그런 세상에서 통용되는 도덕적 당위에 대한 판단은 이 세상과 무관할 것입니다.
좀 더 그럴듯한 사례는 H. J. McCloskey가 1957년에 제시합니다. 한 마을에서 백인 여성이 성범죄 피해를 당했고 진범을 잡지 못하자 백인 남성들이 불특정 흑인 남성들을 살해하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이 때 보안관이 특정 흑인 남성을 범인으로 누명 씌우면 그 한 사람만 죽고 끝날 수 있습니다. 보안관이 공리주의자라면 그렇게 해야 할까요?
좀 더 현대적인 버전도 있습니다. 네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각기 다른 장기를 하나씩 이식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의사가 공리주의자라면 멀쩡한 환자 한 명을 죽이고 장기를 적출하여 다른 네 명의 환자를 살려야 할까요? (뀨: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나왔던 예시입니다.)
하지만 숙고해보면 위 상황들은 공리주의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습니다. 진범이 자백하고 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밝혀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요? 환자들이 자꾸 시의적절하게 죽어나가면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환자를 살릴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요? 또한 두 경우 모두 보안관/의사의 의무와 이들에 대한 대중의 기대를 크게 져버리는 행위라는 점도 큰 문제입니다. 대중이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게 되면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을 것이고 그 결과 심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발각될 가능성이 아무리 낮더라도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고, 그 결과 공리주의에 반하는 행동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리주의자는 전제2가 타당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러할 상황(즉 무고한 아이를 고문살해하는게 다른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주장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전제2가 타당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전제3을 반박할 수 있는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전제3(죄없는 아이를 고문살해하는 것은 항상 부당하다)에 대한 반박은 우리의 도덕 직관에 반합니다. 하지만 3장에서 살펴본 그린의 이중처리이론을 떠올려봅시다. 전제2가 참인 상황은 대단히 희귀하며, 자동적 반응이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전제3에 대한 우리의 자동적 반응은 신뢰도가 낮습니다. 몇몇 행동은 자명하게 부당하기에 숙고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러한 대답에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자명한 부당함에 대한 직관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나,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러한 직관이 항상 신뢰할만하거나 정당화 가능한 도덕 원리는 아닙니다.
효용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나의 행복을 어떻게 측정할 것이며, 또 이걸 남의 행복과 어떻게 비교하고 더할 것인지도 대한 우려도 공리주의에 대한 주요한 반론 중 하나입니다.
1881년, 시즈윅의 제자였던 F. Y. 에지워스Edgeworth는 쾌락측정기hedonimeter 개발을 시도합니다. 첫 단계는 쾌락의 정량화입니다. 그는 서로 다른 쾌락 A와 B를 정확히 동등한 수준의 쾌락으로 맞춰놓고, A의 쾌락을 서서히 높여서 B보다 A를 간신히 선호하는 수준으로 높이면 이 차이를 단위 쾌락, 즉 “1쾌락”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쾌락의 단위는 “인식할 수 있는 최소 쾌락증가just perceivable increment”입니다. (뀨: 용어나 시기를 볼 때, 심리학의 just noticeable difference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보여요.) 단 이 시도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자 다니엘 카네만Daniel Kahneman 덕에 최근에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카네만은 피험자들에게 임의의 시점에 현재 얼마나 긍정적 경험을 하고 있는지를 휴대폰에 수치로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 수치로 개인간 비교를 할 수는 없으나 한 개인의 상대적 행복도는 비교할 수 있습니다.
보건 경제학자들health economists은 질보정기대수명quality-adjusted life-year; QALY이라는 단위를 사용합니다. 어떤 질병에 걸렸고 치료하지 않을 경우 기대수명은 20년이라고 가정합시다. 치료를 받으면 완치되지만 기대수명이 10년으로 단축된다면 치료를 받겠습니까? 10년이 아니라 15년이라면 어떨까요? 이런 식의 비교로 특정 질병이 삶의 질을 얼마나 낮추는지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각 개인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벤담의 원칙을 수용한다면, 서로 다른 사람들의 QALY를 합치거나 곱할 수 있게 됩니다. 물론 비판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병에 걸린 사람, 병에 걸린지 오래된 사람, 병에 안걸린 사람 등이 모두 동일한 병에 대해 달리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책 결정은 해야하기 때문에 QALY를 안쓰는 것에 비해서는 쓰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일례로 영국의 국립보건원UK NICE은 QALY에 기반하여 매년 보건 예산안을 추천한다고 합니다.
각 개인을 동등 고려하라는 벤담의 원칙에 따라 QALY를 더하거나 곱할 수 있다고 했으나, 정말 한 인간의 1 QALY가 다른 인간의 1 QALY와 동등한지는 불명확합니다. 신경과학의 발달 덕에 고통이나 쾌락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으나 유사한 뇌 상태가 유사한 주관적 의식 경험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 효용을 측정할 수 없다는 문제는 공리주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내 결정이 미칠 영향을 추정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공리주의자이건 아니건 때론 추정을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추정했다면 추정에 오차가 있더라도 이를 비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효용의 측정이 때론 어렵다는 주장은 때론 사실이지만 가장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행위가 너무나 명확한 상황도 제법 많고 대체로 상식과 부합하기도 합니다. 물론 때론 상식에 도전하는 결론이 내려지기도 합니다. (뀨: 노예제 폐지, 여성 해방, 동물 해방, 효율적 이타주의 등은 모두 공리주의자들이 시대의 상식에 도전한 사례들입니다.)
공리주의는 지나치게 많은걸 요구하나
전통적 도덕 관념은 하지 말아야할 행동(즉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 등)을 나열하고 이를 지키며 살면 이를 도덕적인 삶으로 간주합니다. 반면 공리주의는 단순히 뭘 “안하면” 되는게 아니라 최선의 결과를 내는 행동들을 “해야” 옳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휴가갈 돈으로 기부를 하면 600명이 3년간 말라리아 예방 접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리주의에 따르면 휴가를 가는건 부도덕할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는걸까요. 공리주의는 평범한 인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도덕 규범일까요?
완곡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휴가를 안가면 번아웃 위험이 있으니 꾸준하고 장기적인 선행을 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휴가를 가는 편이 꾸준한 선행에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공리주의가 생각보다 지나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자신이 충분한 선행을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강경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공리주의가 지나쳐보이는 이유는 세상에 그만큼 문제가 많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현대는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공리주의의 당연한 요구가 지나쳐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뀨: 밥 안 굶고 말라리아 걱정 없는 나라에서 편하게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런 생각이 들지요 ㅜㅜ)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뀨: 밥을 굶지 않고 인터넷에 쉽게 접속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들 포함) 중 대부분은 성인saint이 아니기에 우리 대부분은 공리주의에 따르면 도덕적 의무에 충실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 일반적으로는 비난을 합니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는 비난이나 칭찬에 대해 달리 접근합니다. 공리주의자는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와 ‘사람들의 어떤 행동을 칭찬하거나 비난해야 하나’를 구분합니다. 해야할 일을 안했다며 비난하는 행위 그 자체도 공리주의적 평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뀨: 즉, 타인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게 효용을 향상시키는지,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화풀이에 불과한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가지 방법은, 행위의 옳고 그름을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현재의 표준적 규범에서 벗어난 정도degree에 대한 문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칭찬과 비난 뿐 아니라 모든 윤리적 판단에 대해 이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옳거나-그르거나의 이분법 대신 더 옳거나 덜 옳다는 식으로요. 이를 스칼라scalar 공리주의라 부릅니다. 스칼라 관점에 따르면, 누구라도 지금보다 10원 더 기부하면 ‘조금 더 옳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뀨: 즉, “수입의 10% 이상을 기부하지 않으면 안돼”라는 기준 대신, “지금 얼마를 기부하건 그것보다 10원 더 기부하면 그만큼 더 옳은 행동이야”라고 생각하라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저 스스로도 어제의 나에 비해 오늘의 내가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인지만 생각하며 살기로 마음 먹었는데 이런 태도랑도 잘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리주의는 특별한 의무special obligations를 무시하길 종용하나
나와 무관한 두 아이를 구하고 내 아이를 한 명을 포기하는 선택이 옳은 선택일까요. 벤담과 동시대의 공리주의자인 윌리엄 고드윈은 초기에 그렇다고 주장했으나 당대 사람들에게 극도로 비판받은 후, 그리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특별한 관계를 맺은 후 입장을 선회하여, 특별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건 우리의 행복과 타인에 대한 친절함 등을 강화하기에 공리주의에 부합한다고 주장합니다.
Derek Parfit은 이러한 치우침partiality을 “비난할 수 없는 부당행위blameless wrongdoing”라고 명명합니다. 공리주의자는 따라서 이러한 행위를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이러한 치우침을 극복한overcome 소수의 인물들을 칭송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공리주의는 개개인의 개별성the separateness을 무시하는가
롤스는 개인이 후에 큰 고통을 피하려고 당장 작은 고통을 감내하면 이는 옳은 일이나, 한 사람이 작은 고통을 감수하게 하여 다른 사람이 겪을 큰 고통을 피한다면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즉, 공리주의가 개인의 개별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시즈윅은 개인의 개별성이 ‘실재하고 본질적인real and fundamental’ 문제라고 인정하며 따라서 개인주의egoism를 기각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2장). 그리고 공리주의자는 개인이 미래의 고통과 현재의 고통을 교환할 수 있기에 사람 간에도 고통을 교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롤스의 비판은 부당합니다.
또한 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과 개개인의 효용을 교환할 수 있다는 주장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부자에게 세금을 많이 징수하여 복지에 쓰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개별 인간은 쾌락을 담는 그릇receptacle일 뿐이며 쾌락이 다른 그릇에 옮겨 담아질 수만 있다면 개인은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식의 비판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리주의는 쾌락과 주체가 분리가능하다고 보지 않으며 쾌락이 가치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 주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이 비판은 부당합니다. (뀨: 톰 리건Tom Regan이 적어도 25년 동안 이 비판을 해왔어요. 반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비판을 이어왔다는 점에서 학문적으로 정직하지 못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쾌락/고통을 더하거나 빼서는 안된다는 반론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면 어떨까요. A와 B가 붕괴된 건물에 깔렸는데 둘 다 구하려면 구조물 하나를 파괴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B는 발가락 하나를 잘리게 됩니다. B만 구하고 A를 구하지 않으면 B의 발가락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B의 발가락을 희생하더라도 A를 함께 구하는게 당연하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개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는지 여부와 개개인의 쾌락과 고통을 합산할 수 있는지 여부는 별개입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칸트주의적 반론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 상황에서, B의 발을 도구로 써야만 A를 구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B의 발가락이 잘릴테니, 그렇다면 A가 죽게 두어야 하는걸까요?
효용의 분배 문제
세상에 A/B/C 세 사람만 있고 효용을 분배할 방법이 다음 둘 뿐이라고 가정해봅시다
- 1안: 5:5:5
- 2안: 15:1:0
2안의 총합이 1안보다 크니 2안을 선호해야 할까요?
만약 단위가 효용이 아니라 돈이라면 1안을 선호해야 합니다. 2안에서 A의 돈 일부를 B와 C에게 줘서 1안과 유사하게 만들면 A의 행복은 약간 줄고 B와 C의 행복은 크게 늘테니까요. 하지만 단위가 돈이 아니라 효용라면, 한계효용체감의법칙 등이 이미 반영되었을 것이므로 돈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게다가 2안에서 B나 C가 A에 대해 느낄 질투심 등도 이미 다 반영되어 있을테니, 2안의 행복의 총합이 더 크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한계효용체감의법칙은 평등한 사회가 불평등한 사회보다 나은 사회라는 믿음의 근거 중 하나입니다. 현재 세상의 소득 분배는 극도로 불평등하므로 공리주의자도 평등을 추구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만 행복의 총합이 낮아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요.
(뀨: 공리주의자는, 적어도 다원공리주의자가 아니라면, 평등 자체에 내재적 가치가 있기에 평등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현재 세상이 너무 불평등하고 인간의 행복은 한계효용체감의법칙을 따르기에, 행복의 총합을 높이기 위해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어요.)
공리주의자와 이갈리테리언의 차이는 평등 자체에 내적 가치를 부여하는지 여부에서 갈라집니다. 단 이갈리테리언에게도 평등이 유일한 가치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10:4:4인 사회와 3:3:3인 사회 중 후자가 더 평등하지만, 전자의 행복의 총합이 월등하기에 이갈리테리언이라도 전자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갈리테리어니즘은 평등을 내재적 가치로 인정하기에 3장에서 살펴본 다원결과주의와 동일한 문제를 지닙니다. 서로 다른 가치인 행복과 평등을 어떻게 비교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이 추가로 제시되어야만 합니다.
(뀨: 전형적인 사과와 오랜지 문제 같아요. “웰빙 = a행복 + b평등” 형태의 선형결합식에서 각 항의 계수 a와 b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에 따라 “웰빙” 값이 달라지는데 a와 b를 정할 합당한 원칙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이해했어요.)
제5장. 규칙들Rules
개별 행위의 결과를 따지는 공리주의를 행위act 공리주의라고 부릅니다. 이와 대비되는 개념은 규칙rule 공리주의입니다. 규칙공리주의는 행위의 정당화가 두 단계 절차라고 주장해요.
- 행위가 규칙을 따르는지 여부를 따져보기
- 그 규칙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된 규칙인지 따져보기 (즉 절대 다수가 규칙에 따르면 최선의 결과가 얻어지는지)
규칙공리주의는 4장에서 살펴본 보안관, 의사 사례의 문제를 피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은 반드시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의사는 의도적으로 환자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등의 규칙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쉽게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들은 규칙공리주의가 때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행위를 막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행위공리주의와 달리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99%의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고 나머지 1%의 경우엔 그렇지 못한 규칙 R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나머지 1%의 상황에 마주친 경우, 충분히 숙고할 시간이 있고 편향된 판단을 내릴만한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규칙 R을 따라야한다고 주장하면 이는 “미신적 규칙 숭배”가 아닐까요.
(뀨: 앞서 저자들은 현실과 맞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여 도출한 결론은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는 식의 반박을 했는데, 위 문장도 약간 그런 느낌이 들어요. “편향되지 않는”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일까요?)
규칙공리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규칙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외를 추가하며 점진적으로 규칙을 복잡하게 만들면 결국 규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개별 사례들이 규칙에 열거되고 말 것입니다. 규칙공리주의 옹호자는, 어린 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만큼(뀨: 연령차별적 발언일까요?) 간단한 규칙이어야 한다고 재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복잡한 규칙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저자는 가상의 사례로 시한폭탄 시나리오를 소개합니다.
2시간 후 터지는 핵폭탄을 도심지에 설치한 테러리스트를 체포했습니다. 폭탄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해야할까요 말아야할까요? UN 입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고문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예외라도 허용하면 어떤 식으로든 이 예외를 넓히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위공리주의자에겐 “예외 없는” 규칙이란 없습니다. 위 시나리오를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어떤 광신도 집단이 한 국가의 핵시설을 장악한 후 메시아 재림(아마게돈)을 위해 전 인류를 서서히 방사능 피폭으로 죽일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교주를 고문하는 것 이외에 어떠한 방법도 없더라도 고문을 해서는 안될까요? 저자들은 이런 상황이라면 고문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뀨: 맥락과 약간 별개이지만 저자들이 사용한 여러 예시에서 종교, 특히 유대-기독교 계열의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공저자 중 한 명인 싱어는 “동물해방”에서도 성경을 강하게 비판한 바 있어요.)
비밀로 하기
둘 중 한가지 입장을 골라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 인류가 멸절하더라도 고문을 하지 않기
- 고문 행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특정 상황에 대해서는 고문을 허용하기
시즈윅은 세번째 가능성을 제안합니다. 예외적 규칙을 만들고, 대중에게는 비밀로 하는 방법입니다. 시즈윅은 대체로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간단한 규칙과 예외적인 상황까지 고려한 복잡한 규칙이 있을 때 대중에겐 간단한 규칙을 알리고, 복잡한 규칙을 잘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소수만 복잡한 규칙을 운용할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 소수는 당연히 공리주의 원칙에 따라 불편부당하며 모두를 위해 최선의 결과에 이르는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요. 하지만 시즈윅의 주장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하며 엘리트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공리주의는 자기부정적self-effacing 이론인가
철학자들은 공리주의를 ‘무엇이 옳은지 설명(웰빙의 극대화)하는’ 역할과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한 가이드(행동의 영향을 받을 모든 이들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하기)’ 역할로 구분합니다. 공리주의자는 이 중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설명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위해 어떤 행동을 할지에 대해서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행동” 대신, 칸트주의를 따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가끔 다른 이론을 따르도록 유도하는 이론을 “부분적 자기 부정partially self-effacing”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어떤 이론이 자기부정적이라고 해서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건 아닙니다. 때론 공리주의를 따르지 않는 것이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럴 때엔 공리주의를 따르지 말라고 말해야 공리주의에 따르는 것입니다.
공리주의엔 여러 패러독스들이 있습니다. 특히 시즈윅의 엘리트주의적 발상이 그렇습니다. 따라서 몇몇 상황에서는 공리주의가 아닌 다른 이론을 따르는 편이 좋을 수도 있으며, 기왕이면 다른 이론을 따라야만 하는 공리주의적 근거가 있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제6장. 현실에서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 in Action
현실의 공리주의는 행복보다는 괴로움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배고프고 춥고 아픈 이들에겐 식량, 집, 약을 공급하면 되지만 기본적 문제가 해소된 뒤 이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만들지는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다른 이유는 괴로움과 행복함 사이엔 비대칭성이 있다는 철학적인 이유입니다.
(6장의 설명은 모두 쾌락공리주의 관점에서 쓸 것이나 살짝만 바꾸면 다른 공리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괴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은 상태를 0이라고 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최대 행복이 100이고 도달할 수 있는 최대 괴로움이 1000이라면 행복과 괴로움 사이에 비대칭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괴로움이 감소되면 종종 다른 누군가의 괴로움이 커지곤 하기에 정책 결정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공리주의 입장에서 쉽게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는 많은 이들의 괴로움을 크게 감소시키면서도 다른 이의 행복을 저하시키지 않거나 조금만 저하시키는 분야들입니다.
이런 분야가 남아 있을까요? 저자들을 그렇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 기존의 도덕 규범을 크게 바꾸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
- 고통을 받는 이들이 우리의 관심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
이 중 1번 범주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삶을 끝내는 결정End of life decisions
2009년, 글로리아 테일러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ASL에 걸립니다. 근육을 서서히 잃다가 결국 호흡 중단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테일러는 죽는 시점을 스스로 정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캐나다에서는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수동적 안락사는 합법이나, 처방을 통한 능동적 안락사는 불법이었습니다.
수동적 안락사가 불법인 이유는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전통적 윤리관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규칙 기반 윤리는 많은 이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결정을 사소한 차이(본인이 희망하더라도 기계를 꺼서 죽이면 합법, 약을 먹여서 죽이면 불법)에 의해 내리곤 하기에 문제적입니다.
물론 테일러의 안락사를 위해 꼭 공리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권리론에 기반하여 ‘죽을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율권right to autonomy을 ‘죽을 권리’까지로 확장하고, 이를 다시 확장해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 죽을 권리’를 주장할 논리적 근거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권리론의 난점 중 하나입니다.
결과주의적으로 생각해도, 무고한 사람을 죽여도 된다면 보통은 매우 안좋은 결과에 이를 것입니다. 삶은 행복보다 괴로움으로 가득하다고 여기는 어떤 공리주의자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다면 직접적으로는 죽은이의 잠재적 행복을 박탈하고, 간접적으로는 남은 이들을 비통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테일러의 사례는 어떨까요. ASL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가는 중이기에 당사자의 잠재적 행복을 박탈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가 오래 고통받으며 서서히 죽어가길 원치 않을 지인들의 입장에서도, 테일러의 안락사로 인해 이들이 겪을 비통함은 오히려 경감될 것입니다. 결과주의적(공리주의적) 판단이 권리론에 비해 깔끔합니다.
판사 Lynn Smith는 이러한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여러 국가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였으며, 네덜란드와 오레곤 등 수동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곳들의 사례(특히 악용 가능성)를 분석한 결과, 수동적 안락사를 허용했습니다. 덕분에 이제는 캐나다에서도 불치병에 걸린 이들이 수동적 안락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리학과 동물Ethics and animals
안락사 문제는 인간의 죽음과 관련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견해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인간 동물의 살해에 대해서라면, 인간들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인간들은 스포츠를 즐기려고, 옷 만들려고, 그저 입맛에 맞아서 등 온갖 종류의 사소한 이유들로 수많은 동물을 죽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거대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가합니다. 인간은 동물의 이익interest에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뀨: 톰 리건은 싱어가 “입맛에 맞아서”를 사소한 이유라고 주장한 점을, 미식가의 중대한 권리를 가벼이 여긴다는 식으로 비판한 바 있습니다. 톰 리건이 피터 싱어에 비해 더 ‘급진적인’ 동물권 옹호자라는 관점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공리주의에 위배됩니다. 비록 동물의 ‘고통없는 죽음’에 대한 관점엔 여러 차이가 있으나 모든 저명한 공리주의자들은 동물과 인간의 고통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벤담은 ‘도덕 및 입법 원리 입문’에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익은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벤담이 이 말을 할 당시에는 동물학대를 금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200년 넘게 지난 지금도 여전히 동물학대를 금지하는 법은 대단히 제한적이고 공장식 축산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허용합니다.
동물실험은 잠재적 이익의 크기가 육식에 비해 훨씬 크기에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공리주의자와 권리론자의 관점이 종종 갈립니다. 일부 권리론자는 권리가 절대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경우에도 동물실험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공리주의자에게는 무조건 지켜야할 규칙이란 없습니다.
수많은 동물실험은 화장품 신제품 개발 등 매우 사소한 목적으로 동물을 학대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하지만 의학 연구 등 일부 실험은 잠재적 가치가 클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음 조건을 빠짐없이 모두 만족하는 경우라면 동물 실험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 많은 수의 동물/인간의 죽음이나 고통을 막을 신약 개발의 잠재성이 꽤reasonable 높음
- 몇몇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지 않고서는 이를 달성할 다른 길이 없고 신약 개발로 인해 이득을 볼 동물의 수가 월등히 많음
- 실험 동물이 겪을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절차를 준수
- 신약 개발 이외의 다른 분야에 동일한 시간과 돈을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더 큰 이익이 없음
(이 책의 공저자 중 한명인 피터 싱어의 유명한 저서 <동물 해방>을 참고하세요. 2장은 동물 실험, 3장은 공장식 축산의 문제를 다룹니다.)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
벤담은 세금을 가난한 자들의 복지를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대의 일반적 견해와 달리 “자격이 있는” 가난한 자 뿐 아니라 누구나(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 포함) 도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굶어 죽는 고통에 비해 부자가 세금을 내는 고통이 작기 때문입니다.
벤담의 시기엔 교통과 물류가 발달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제약이 거의 없기에, 위 논의가 전세계적 규모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공리주의자들과 종교인들의 활동으로 2015년 이후 전세계의 극빈자 비율이 10% 이하로 내려갔습니다. (1960년 2천만에서 2015년 6백만. 2배 이상의 인구증가를 고려하면 더욱 희망적입니다.)
하지만 부유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극도의 사치를 하고 있고, 여전히 굶어 죽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효율적 이타주의 운동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고자 2009년에 시작되었습니다. 피터 싱어의 글 “기근, 풍요, 도덕famine, affluence and morality”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그냥 선한 일을 하는걸로는 부족하고, 가장 효율적인 선한 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적으로 어떤 단체에 기부를 해야 가장 효율적인지를 근거에 기반하여 평가합니다. 또 가장 효율적인 선행을 하기 위해 혈연, 지역, 국가를 뛰어넘는 불편부당한 관점을 가질 것을 강조합니다. (또 다른 예로, 효율적 이타주의자들은 어떤 동물이 얼마나 고통을 느끼는지에 대한 근거를 모으기 위해 기존 과학 연구들을 메타분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동물의 의식 경험“을 참고하세요)
인구 퍼즐Population puzzles
시즈윅은 전체 인구수가 증가하고 평균적인 행복이 감소하더라도 행복의 총합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뀨: 예를 들어 10만큼 행복한 10명이 있으면 행복의 총합이 100. 인구가 2배로 늘어서 20명이 되고 그 탓에 각자의 행복이 약간씩 줄어 8이 되면 총합이 160) 이 상황에서 공리주의자는 행복의 총합을 극대화해야 할까요, 행복의 평균을 극대화해야 할까요? (뀨: 이는 허황된 논리 퍼즐이 아니라 전염병 예방, 인류 멸종 예방 등의 문제와 관련이 있어요. 철학자들의 사고 실험을 지적유희로 치부하는 경우를 많이 봐서 부연했습니다.)
시즈윅은 총합의 극대화를 지향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도 이 관점에 동의하며 이런 사고실험을 소개합니다.
행복도 100점 만점 중 99점인 사람만 사는 낙원대륙이 있습니다. 통계청이 행복도 조사를 했더니 평균 99점. 낙원대륙의 탐험가들이 다음해에 신대륙을 발견합니다. 신대륙의 인구수는 낙원대륙과 동일하고 행복도는 평균 90점입니다. 한편 낙원대륙 거주민은 신대륙 발견에 들떠서 행복도 평균이 1점 올라 100점이 됩니다.
통계청이 신대륙 인구를 포함하여 다시 행복도 조사를 했더니 평균이 95점으로 낮아졌습니다.
위 시나리오에 따르면 낙원대륙의 행복도는 올라갔고 신대륙의 행복도는 그대로인데 평균이 떨어졌으니 나쁜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평균이 아닌 총량을 기준으로 평가하는게 타당하다는 주장입니다.
(뀨: 이 예시는 좀 이상해요. 평균이 떨어진 이유는 통계청이 기존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새로운 집단을 포함시켰기 때문이 아닌가요? 애초에 두 집단 모두를 포함해서 계산했더라면 신대륙 발견 후 평균도 살짝 높아졌을 것입니다.)
반면, 평균이 나은 이유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대단히 행복한(행복도 90점) 사람들 10명이 사는 세상(총점 900)과 간신히 불행하지 않은(행복도 10점) 사람 100명이 사는 세상(총점 1000) 중 후자가 정말 더 나은걸까요? 이렇게 보면 평균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
낙원대륙과 신대륙 사례는 아쉽게도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현실에도 비슷한 개념이 있습니다. 일례로 UN은 2012년부터 실제로 국민총행복을 추정하여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탄의 영향인데요, 부탄은 그 전부터 GNH에 기반하여 모든 정책을 평가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부탄에서는 담배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어요.
4장에서는 행복 측정의 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행복도를 정부 정책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로 쓰는게 실현 가능할까요? 사회학자들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행복을 측정합니다.
- 행복한 순간들을 모두 더하고 불행한 순간을 모두 뺀 숫자로 계산
- 지금까제의 삶의 만족도를 수치로 답하게 하여 계산
전자의 방법을 쓰면 나이지리아, 멕시코, 브라질 등이 선두를 차지합니다. 후자의 방법을 쓰면 덴마크 등 부유한 나라가 선두입니다. 전자는 문화적 요인, 후자는 보건/교육/삶의 수준 등 객관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단 다양한 문화/다양한 언어의 결과를 직접 비교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하네요.
UN 이후 여러 국가 및 국제기구에서 행복을 중요한 지표로 측정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OECD는 2013년에 “더 나은 삶 이니셔티브”를 출범시켰고, UNDP도 관련 지표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행복에 대한 과학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정책에 행복을 고려하는 시도도 더 힘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벤담이 살아 있었다면 기뻐했을 것입니다.